흡연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_막스 베버

접골 2023. 9. 10. 01:41

프롤레타리아들이여, 일하고 또 일하라, 사회적 부와 너 자신의 개인적 가난을 증대시키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라, 더 가난해지기 위해. 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일하라. 그러면
그만큼 더 비참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헤어 나올 길 없는 법칙이다.
_폴 라파르크,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중

급작스럽고 전투적인 문구로 보이지만 다시 보면 별달리 충격적일 것도 없다. 자본주의는 그저 공기 같은 것이 된 지 오래다. TV 앞에 앉은 사람에게 광고(차승원이 이번 아사히 모델이야?)와 전쟁소식(미국이 또 어딜 친다고? 헐. 그러지 말지.)과 리얼 버라이어티쇼(유재석 엄청 잘 뛰네.)가 두 눈 위로 평온히 흘러가는 일처럼 우리는 무수한 자극을 비슷한 무게와 가치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하물며 자본의 폭력성이라니 식상하기 그지없는 관용구 아닌가. 웬만한 가학은 우습게 받아줄 만큼 너와 나의 맷집은 강해져 있다. 안 그래도 올해 역시 우리들은 충분히 흉흉하게 짜부라져있다. 내일의 흉흉함이 오늘의 흉흉함보다 커지지 않길 빌어보는 일은 현명한 이들의 꿈이 되었다.

꿈이 오래되면 뭐가 되는 줄 알아? 욕심이 되는 거야.
그럼 욕심이 오래되면 뭐가 되는 줄 알아? 바로 죄가 되는 거야.
_(기억나는 대사가 확실치는 않지만) 애니메이션 Up 업 중

꿈이 죄가 되는 구조는 현대사회의 불문율이 되어버렸다. 요컨대 노동가능성이 있는 개인이 생산활동을 하지 않을 때(자의이건 타의이건) 그것은 죄악이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보여줄 수 없는 것, 언젠가는 보이게 될 것은 지금 소용이 없다. 나타나지 않은 것은 곧 무가치한 것이다. 음양에서 양, 의식과 무의식에서 의식, 상상계가 지워지고 현실계만 남은 것이 이곳의 생태구조이다. 개개인의 생존법은 이 생태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각 개체의 재능과 가능성은 반드시 계량화, 수치화가 가능해야 하며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결과론, 성과주의와 맞닿게 된다. 됐고 그걸로 얼마 버는 데? 그러니까 건 당 얼마? 연봉은?

아, 이걸 다 써야 해? 필수기재사항?
일자리창출효과, 2차 사업효과, 한류문화수출효과...
_친구들과 수십 페이지의 창작지원금신청서를 작성할 때 대화(결국 단박에 탈락했다.)

언젠가 반드시 죽지만, 아직은 죽지 않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삶이고, 삶이란 자신을 증명해 나가는 작업이다. 의식이 있는 인간의 태반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실현하거나 실현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증명의 방법이 단일할 뿐이라면? 단일한 데다 강력하기 짝이 없다면?

칼뱅은 루터를 계승하여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한 구제 가능성을 부인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구제가 이미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제시했다.
인간은 세속적인 직업 활동과 합리적이고 금욕적인 일상생활을 통하여 신의 은총을
외부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예정설은 종교의 생활화를
강조하는 동시에 현실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중시하는 엘리트주의의 면모를 띠게 되었다.
칼뱅의 교리는 당시 절대주의체제와 대립하면서 경제적으로 상승의 길을 걷고 있던
중산층의 호응을 받아 영국,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등지로 전파되었다.
_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6세기 유럽, 안온하고 소박한 가톨릭 정신은 이제 어떤 집단에게 도저히 맞지 않았다. 또한 여느 사상들처럼 아전인수로 활용, 쉽게 부패하기에 이른다. 면죄부 판매는 패악의 단적인 증거였다. 교황을 포함한 교회 전반의 상태가 구태롭고 표리부동했다. 그러나 사회 문화와 경제 상황은 이전과 달랐다. 오랜 시간 노동은 비천하게 여겨졌으나 이제 노동으로 바뀌는 것은 많고 중요했다. 판이 바뀌고 틀이 갈렸다. 사제와의 대화를 통해 죄가 씻기지는 않는다. 소명의식을 갖고 세상의 일을 하라. 가톨릭계는 끝물에 이르렀다. 계급은 타파될 조짐이 보였다. 유럽은 격동했다. 생산계층의 노동과 경제활동은 더 이상 폄하될 것이 아니었다. 새 종교관은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여러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교황은 그 자신 혹은 교회법의 권위에 의하여 부여된 이외의 어떤 다른 형벌에 대해서도 용서하거나 사면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의지를 전혀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부에 의하여 인간이 모든 형벌로부터 벗어나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면죄부를 산 돈이 돈궤짝에 딸랑 소리 내며 떨어질 때 이득과 탐욕이 증가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의 중보기도에 대한 응답 여부는 신의 의지에만 달려있다.
_마르틴 루터, 95개의 반박문(1517) 중 5, 21, 28번. 

신이 구원을 약속한 인간에게 표식을 내렸다면(목 뒤편에 십자무늬가 있다든가 왼쪽 팔이 기이하게 비대하다든가 그림자가 없다든가 그도 아니면 확실하게 꼬리가 있다든가)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사람의 삶은 좀 더 끔찍해졌을까. 혹시라도 평화로워졌을까. 루터 이후 칼뱅의 예정설은 인간의 자유의지(그리고 그 개념이 가진 가치 모두)를 무화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인간이 어느 때보다 의지를 갖고 노동에 투신하게끔 했다. 컴컴한 불확실함 앞에 선 인간은 더없이 확실해졌다. 명료하고 신속하고 구체적인 행위로써 그는 자신을 증명해야 했으며 이것은 소명이라 불렸다. 신 앞에서 근면 성실히 일하는 게 좋을 걸. 하지만 네가 구원받을지 아닐지는 몰라.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불합리한 논리이지만 칼뱅의 업적은 대단했다. 자의건 타의건 그는 인간의 불안을 건드렸던 것이다. (때문에 그의 주장은 사회심리학적으로 많은 연구가 따른다). 이 세계관의 유입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결론적으로 막스베버에 따르면 칼뱅 신학은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고 만다. 나아가 청교도적 삶, 벤자민 프랭클린으로 대표되는 근대미국특유의 견실한 성공신화는 자본의 축적량 자체가 신의 가호와 비례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신이 그와 함께한다는 증표는 곧 그가 가진 돈인 것이다. 성공과 구원이 동시에 담보되는 삶! 그러니 돈 벌지 않는 자=낙오한 자, 불행한 자가 된다. (그런 면에서 개신교 목사들의 망언, 이를테면 그 가난한 나라의 지진은 하나님의 뜻, 복 받은 부자나라 미국을 본받아, 따위의 논리는 그들의 작은 머릿속에서 언제까지나 정연한 셈이다.) 일해야 하는 이유가 이만큼 충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본의 축적에는 제한이 없다. 인간의 불안과 죄의식은 매일 생성된다. 공포와 욕망은 노동을 향한 절대적 추동력이 된다. 그런데 한도가 없는 그 지점을 공유한다고? 비우고 내려놓으라고? 너부터 내려놓지 그래. 애초부터 우리들의 약속은 모두 헛것일 뿐이다. 심지어 나는 너의 욕망을 욕망할 수도 있다.

"(종전에) 퓨리탄은 직업인이 되려고 원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직업인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은 수도원에서 직업생활의 한가운데로 옮겨지고, 세속 내적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이번에는 기계적 생산의 기술적, 경제적 조건에 묶여있는 근대적 경제조직의, 그 강력한 세계질서를 만들어 내는데 힘을 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질서야말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현재 그 기계장치 속에 들어가는 일체의 제 개인-직접 경제 영리에 종사하는 사람만이 아니라-의 생활을 결정하고 있고, 장래도 아마 화석화된 연료의 최후의 한 조각이 탈 때까지 그것을 결정할 것이다."_본문 중(좀 어지러워서 몇 번 읽어야 뜻이 보인다.)

결국 벌어질 일이었다. 정말로 노동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금세 인간을 집어삼켰다. 수단과 목적, 과정과 결과는 뭉뚱그려졌다. 죄나 사소한 잘못은 그저 고였다. 말할 입도 들어줄 귀도 사라졌다. 신 앞에 단독자로 선 인간은 한없이 외롭고 전투적으로 변모했다. 우리는 기계를 만들자마자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미래의 불길한 냄새를 잘 맡을 줄 알았던 사상가들의 예단과 마찬가지로 베버의 비판과 의심은 예리하고 유의미했다. 불안을 자양분으로 삼은 자본주의는 그 끝이 없었다. 뼈대와 골격이 엄청나게 단단해졌다. 베버의 논문을 통해 가장 흥미롭게 고찰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신이 부재한 자리에 어떻게 자본이 들어앉게 되었는가. 그 허방의 구조는 왜 철근구조물처럼 튼튼한가.

(소비계층에서 분리된 혹은 가업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생산계층-노동-신
                                       (거의 모두가) 소비계층이자 생산계층-노동-자본

오늘날 우리는 신도 지옥도 믿지 않지만 일을 하지 못하면 자책감과 절망에 휩싸인다. 마땅한 아르바이트자리를 찾지 못한 취업준비생은 아마 천국에서도 불안해할 것이다. 연봉 이천의 회사원은 연봉 삼천이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건물 세 채를 가진 자산가는 네 번째 건물을 위한 자본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근심한다. 재원을 창출하지 못할 때도, 더 많은 재원을 창출하지 못할 때도 현세의 인간은 끊임없는 걱정에 휘말린다.


천국                                                          지옥(신에게 버림받음)
        <-           노동                   <- 공포
자본                                                          가난(소비활동을 못함)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현대에 이르러 완전한 부도덕이 되었다. 신 대신 우체국예금보험을 믿어도 우리는 비난받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화폐로 환원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표식이자 자신의 재능 없음, 미성숙, 무능력, 게으름, 방종을 스스로 드러내는 짓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직업이 소명이 아닌 시대에서도 왜 존재의 의미를 직업에서 찾는가. 왜 무엇을 하고 있는 나만이 본래의 나로 비치는가. 너의 휴식은 왜 직무유기가 되는가. 물론 존재는 연소를 원한다.(불안노동을 포함해 성, 죽음 등의 다양한 이유로.) 하지만 미친 속도의 연소를 원하는 불안한 존재는 의문을 남긴다. 이것은 어떤 잔존, 자국, 흔적 같은 것은 아닐까. 신이 준 재능을 달란트라고 일컫는데, 재능이 없다는 것은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함을 뜻한다. 곧 할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천국에서의 낙오, 곧 영원한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다. 패색이 짙다거나 불운하다거나 이런저런 형용을 갖다 붙일 수 없는 말 그대로의 죽음. 이 강한 충격은 그대로 강한 상징이 되지 않았을까. 소외, 열패감, 실패, 불행 등의 부정성을 총괄하는 한 축. 한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 만든 임의의 질서. 실제의 지옥이나 가상의 지옥 모두 인간을 위축시킨다. 위축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두 가지이다. 움직임을 줄여가는 것과 의미 없이 움직이는 것. 중세 기독교관에서의 공포와 현재의 공포는 그 구조와 원인이 상당히 흡사한데

      
            지옥(신에게 버림받음)->천국에서의 열외

  공포
        
            가난(소비활동을 못함)->사회에서의 열외


결국 ‘시스템에서 추방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 그 공통점이다. 시스템 자체가 가짜이거나 거짓이거나 허구라 할지라도 관계없다. 아니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안된다. 구조물의 오류를 지적하는 집단은 일찌감치 피곤한 논외대상이 되어버린다. 불안은 강력하기 짝이 없는 감정체제이며 불안한 인간은 구조의 개선은커녕 구조 자체를 직시할 수 없다.(영화에서 총을 쥐어진 채 대치상황에 처한 두 주인공을 생각해 보자. 그들의 귀는 누군가의 말을 듣는 감각기관이 아니라 그저 작은 연골이 달린 살덩어리일 것이다.) 무생물인 시스템은 우리보다 더 생생히 숨을 쉰다. 그러니 이탈이란 상징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죽음인 것이다. 쫓겨난 자, 쓸데없는 것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그러니 우리는 진짜 지옥보다는 동일성의 지옥으로 흡수되는 편을 택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지만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_보이지 않는 도시들/이탈로 칼비노(야광도시 전에서 인용구로 쓰고 또 데려온다.)

열심히, 성실히, 죽도록 일해.
그런데 왜?

삶의 의미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도, 일하기 위해서도,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닐 것이다. 직업을 통한 극도의 자아실현 또한 삶의 수련법 중 하나로 삶의 목적 자체는 아닐 것이다. 허망하고 잔인하지만 인간은 정말 그저 DNA의 정거장(이기적 유전자) 일뿐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염세는 괜찮은 답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답을 내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정에 대해 더 말하고 싶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시스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갖기, 자유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기,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기, 분노하기, 가만히 멈추어 주위를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 것. 결국 내내 방황해 보자는 것이다. 이 대안들은 모두 삶의 과정에 대한 제안이다. 결과친화적인 시스템은 점점 매끄럽고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해 간다. 완강하고 비정하며 오만한 날티는 지울 줄도 안다. 그것은 예전보다 가혹하고 엄정한 질서를 구축했다. 구조를 무시하기엔 삶 자체가 구조인 꼴인데 이 양식을 너와 나는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춤을 추며 조롱할까. 스르륵 미끄러질까. 자조와 냉소를 재료로 무엇을 만들어볼까. 불만이 슬픔이 되기 전에, 슬픔이 체념이 되기 전에, 체념이 체화가 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사라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곳의 조감도를 어떻게 재활용하고 재구성할지 공부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