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WILD, SPEAK LOUD, THINK HARD
내가 볼 때 오늘날 세계를 가르는 거대한 경계선은 보수와 진보, 부자와 가난한 자, 서로 다른 인종, 신념 들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들을 용기가 있는 사람과 이미 다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_매들린 올브라이트
이사를 하고 수술을 하고 간병을 하고 소설을 쓰고 새 일터에서 업무를 익히고 두 번째 고양이를 입양하는 동안 나는 조용한 시민 시늉을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세상사 통찰은 SNS 멋쟁이들이 대신해줬다. 일정이 없을 때면 일기에 조잡한 기분을 공들여 적고, 한 오백 년 된 지박령처럼 집에 머물렀다. 창밖에 별 일은 없었다. 매연 가득한 도심, 무심한 타인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아름다울 뿐인 한강의 야경이 가끔 그립기도 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의 삶은 의외로 다성적이고 풍요로웠다. 그러다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나는 다급히 대화 상대를 찾고 있었다. 막상 사람들을 만나 이번 사건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날은 마음만 쫓기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피해자를 단순히 약자라고 봐야 하지 않아? 페미니즘 진영에서 이 사건을 이용한다고 느껴. 피곤해. 난 여성혐오 한 적 없는데. 내 안의 일베, 여혐, 소수자 멸시를 다 생각하고 살라고 하면 거의 원죄의식을 품고 살라는 건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 왜 혐오라는 단어를 쓰는 거야? 아니, 시선강간이라는 말도 있더라고. 남자로 태어난 게 잘못이야? 진보와 보수 언론들이 프레임을 나누던데. 내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권신장운동은 당연히 지지해.” 나는 차례를 기다리기도 하고 언쟁 사이에 끼어들기도 하며 어눌하게 말을 꺼냈다. 입을 열면 열수록 울분이 쌓이고 낯빛은 고동색이 되어갔다. 어떤 영역이든 본래 쪼렙은 패를 다 보인 채 흥분하기 마련이고 그곳은 페미니스트 찌랭이인 내가 랜선 밖 사람들과 처음으로 부딪힌 논쟁 자리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이 주제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생산적이고 수평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던 동료들로 호모 사피엔스로 태어난 이상, 이 한평생 최대한 개저씨처럼 살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가부장제는 엄마의 얼굴만큼 정답고, 여혐은 세상에 있는 네모의 수만큼 발에 차인다. 이게 내 잘못은 아니니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세상은 변하지 않고 우리는 피곤하니까, 더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까, 딱히 와닿지도 않는 페미니즘 운동이 나를 난감하고 불편하게 하니까, 이상하게 페미니스트들은 내가 인간 대 인간으로 지성 대 지성으로 대화할 수 없게끔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니까. 귀를 닫을 이유는 많다. 변하지 않을 까닭도 많다. 그래서 이곳은 진짜 지옥보다 더 단조롭고 피상적이며 일상적인 지옥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게으른 수감자 말고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가짜 중도
우리 곁의 수많은 범죄는 그저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벌어지는 자연법칙처럼 여겨지기 쉽다. 이 전제는 몇 가지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 표적이 되는 그 약자의 주된 성별이 바로 소수자가 아닌 여성이라는 점(2013년 강력범죄 피해자 통계에 의하면 피해자 비율 중 90.2%가 여성이다)을 간과한다는 것이고 둘째, 약자라는 광의의 칭호 아래 피해자와 가해자의 성별을 밝히지 않거나 한쪽 성을 지움(매스미디어의 끈질긴 ‘OO女, 피의자’ 지칭)으로써 약자의 취약성을 조명하고 전시해(성적 매력을 담보한 젊고 검약하며 순정한 여성은 보호받아야 마땅했던 측은한 대상이라고 기술되지만 그 외의 여성들은 자주 은폐되며 이것은 실제 피해 규모의 성격과 양상을 왜곡시킨다) 사태의 본질을 흐린다는 면, 다시 말해 그 기저에 깔린 엄연한 성별억압을 유야무야 처리한다는 측면이다. 생명존중을 대강령으로 삼는 약자보호 범연대 대신 민우회, 성소수자 모임, 장애인 협회 등이 왜 따로 존립하는가. 구체적인 호명이 당사자들의 입장과 처우를 가시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면밀한 파악 및 통계조사에 따른 대책 마련은 뚜렷한 이름을 부른 후에 시작할 수 있다. 셋째, 약자의 약자성이 사회문화적으로 공고하게 합의되는 과정에서 암묵적인 혐오가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나에 비해 하자가 있고 유약하며 다루기 쉬워 보인다는 범죄 동기는 의지가 깃든 의식적 혐오만을 포함하지 않으며 이 관념은 약자의 약자혐오, 강자 숭상 등의 약육강식 논리로 확장될 수 있다. 너무 오래된 관습은 마치 생태계의 흐름 같아서 눈에 도드라지지 않고 그 인식 앞에 선 개인들이 입장을 취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류문화에 있어 원래 그런 것은 없다. 혐오가 생물의 진화 과정에서 개체보호를 위해 발달한 감정이라는 이론이 2016년 문명사회에 내내 통용된다면, 게다가 그 혐오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모른 체 한다면 우리의 연대와 학습은 초라하고 무력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자연스러워 보이는 부조리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여기엔 논점을 추가하거나 비유를 남용해 문제를 산만하고 방대하게 만드는 태도 대신 우선 현상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껄끄러워하거나 남성혐오반대 피켓을 들고 나오거나 페미니즘의 패착지점을 탐색하기에 앞서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순차가 맞다. 당신의 구미에 꼭 맞는 운동만 운동일 리 만무하다. 페미니즘 진영의 행동심리학 전문가들이 수천 명의 여성들을 들고일어나게 한 게 아니다. 배후세력이 고주파를 쏘거나 주술이라도 읊어 이 많은 여성들이 움직인다고 믿는 것이 여성혐오다. 기이할 정도로 부족했던 개개인의 자발적 발언이 이제야 겨우 시작되었다. 우리는 국가가 가부장제를 원동력으로 유지된다는 점을, 사회가 성인 남성의 편의 및 권리를 기본 값으로 설정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환기해야 한다. 2015년 세계경제포럼에서 경제활동 참여도 및 기회, 교육, 건강과 생존, 정치적 권한 등의 항목을 기준으로 평가한 성차별지수(Gender Gap Index, GGI)에 의하면 한국은 145개국 중 115위를 차지했다. 무슨 소리냐고, 나는 여성들과 같이 학습하고 수련하고 근무한다고 항변하는 남성들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같은 해 한국의 성불평등지수(Gender Inquality Index, GII)는 180개국 중 17위이다. 이는 여성과 남성이 대등한 수준으로 학습, 수련, 근무를 해도 그 격차와 결과가 상이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함께 시작했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성장 한계선이 드리워지고 핵심 인력에서 배제되어 도달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있는 한, 어떤 이들은 이 난관을 부드럽고 다감한 화법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의견수렴 창구가 극단적으로 적은 사회에서, 경청을 위한 절차와 과정이 생략된 문화 속에서, 언어는 터져 나오기 마련이고 이 과도기가 우리를 어제보다 더 민주적인 사회로 이끌 수 있다면 우리는 언쟁에서 고단한 야만성을 읽기에 앞서 새로운 각성과 성찰을 시도해 보는 게 낫다. 차별과 불평등이 관념 아닌 실제로 자리하는 곳에서 여성들이 급기야 목숨을 잃어갈 때,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 앞서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당하는 기분이 꺼림칙하고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것보다 이 사건이 촉발된 사회기조와 우리에게 스며들어 있는 여성혐오를 추적해 보는 것이 낫다. 나와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들이 유무형의 일상적 폭력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 그들이 신변에 대해 갖는 불안과 모멸과 위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상상해 보는 것이 낫다. 나아가 페미니스트가 여성혐오를, 성소수자가 장애인 멸시를 하는 일은 전혀 없을 거라고 안위하는 대신 끊임없이 자신 외의 세계를 다차원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하는 게 낫다. 이러한 반성이 없는 공간에 똬리를 트는 화해나 양성평등 같은 말은 시기상조이자 온건하고 합리적인 체하는 폭력이다. 타자에 대한 억압이 유구한 세월을 두르고 활기를 잃지 않는 양상이란 전통이 아닌 인습이며 보호할 가치가 있는 문화 따위가 아니다.
괴로운 자유 입장권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는 통념은 사회가 남성에게 어차피 기대하는 게 별로 없다는 면에서 남성 자신들에게도 모욕적이고, 애와 개의 속성인 미성숙함에는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점에서 여성들에게도 가혹한 속설이다. ‘나 말고도 남자들은 원래 그래’ 라는 자유 입장권을 들고 활달해진 남성은 ‘그들이야 원래 그러니까’라고 체념한 채 놀이동산 입구에서 표를 계속 끊어주는 여성을 반드시 압박하게 되어있다. 이 말은 존재 대 존재의 이해와 소통을 가로막고 이기와 희생으로 배치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성역할을 확대 재생산한다. 페미니즘의 입구에는 하나의 단순한 진실이 적혀있다. 그것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는 문장이다. 여성에 대한 신화나 저주, 찬탄과 혐오는 우리가 오독한 여성성(사회심리학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의 공격성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을 편의에 따라 더하고(당신 왜 그렇게 예뻐요?_홍상수 ver.) 빼며(7만 원짜리 주제에_김기덕 ver.) 멋대로 해석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어떤 성이 더 특별하고 우월한지 가르는 내기가 아닐뿐더러 자기 연민과 수동공격적인 피해자 논리에 취해있는 학문도 아니다(매사에 시니컬해질 수는 있지만). 이 싸움의 대상은 남성이 아닌 남성우위관습, 가부장제로 맞춤화한 사회, 그 토대에서 우후죽순 발현하는 여성혐오이다. 따라서 우리의 적은 남성의 여혐, 여성의 여혐을 모두 포함한다. 국가, 군대, 직장 내 수직구조에 시달리는 남성들도 가부장제를 수호하고 신봉할 이유가 하등 없는데 성역할 고착화에 따른 반대편 짐을 바로 그들 스스로가 짊어지는 까닭이다. 여성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은 전근대적 선입견에 따른 부담이 자의인지 타의인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수렁에 빠져 역시 황망히 착취당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정상이라고 믿는 환경 안에서는 나와 다른 소수의 병자들이 변방에 축출되고 나와 다른 약자들이 실내에 감금된다. 사회의 온갖 병폐는 내 영역 밖 외부의 일, 결국 일부 약자가 일부 병자에게 당한 일부 불행으로 비친다. 이 순환은 혐오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긴장을 증대시키며 문제를 관료적으로 대응할 때의 특성인 미봉책만을 양산시킨다. 게다가 더 조심하고 더 주의하는 자의 자리는 끝도 없이 좁아지는 반면 경계 당하는 자의 사회성과 발언권과 언술 신용도는 계속 높아진다. 밤길은 위험하니 오빠가 데려다줄게,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 선량하고 보편적인 제안이지만 동시에 퇴보한 사회의 언어다. 언제까지나 남성의 시혜로 얻을 수 있는 안전은 우리가 원하는 궁극적 안전이 아니다.
남성의 자아를 장착한 주체왕 여성들
나는..식민지 지식인... 룸펜 인텔리... 동경유학을 다녀왔지만 식민지 시대 내가 뜻을 펼칠 곳은 없다..☆ 나의 어머니는 병들어 나만 바라보고 누이들 동생들도 나만 보지만 아아 사회는 날 받아주지 않아 나는 기생과 논다(일제강점기)/나는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청년... 전쟁은 인간을 말살하였고 인간다움은 사라진다..☆ 어머니는 북을 그리워하시고 여동생은 양공주가 된다 나는 곰팡이 낀 방에서 전쟁의 아픔을 느끼며 움츠린다..☆☆(한국전쟁)/나는 서울로 이주한 공장의 노동자(혹은 지식인) 정치적인 침묵에 숨이 막히고 인간다운 대우는 받지 못한 채 사회에 억눌린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고 나의 여동생은 서울의 매음굴에서 돈을 번다...☆(60년대 이후)_얼마 전 인터넷에서 주운 한국소설 요약본(작성자를 알고 싶다)
우리는 그동안 남성작가들의 세계관과 서술태도에 얼마나 오래 감정을 이입하고 얼마나 자주 자신을 투사했을까. 나를 포함해 너무 오랫동안 남성 저자, 창작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 여성들은 스스로의 주체성을 남성의 방식으로 조립해가기 쉽다. 내적 자아를 가득 채운 남성성이 말한다. ‘이런 감성은 너무 여성적인 태도 아니야? 뭘 이렇게 길게 돌려 말해? 주장이 더 명확하고 선명할 수 없어? 이런 문제도 극복 못하다니 자기 강화와 갱신에 너무 게으르군. 이걸 여자가 쓴 거라니 놀랍네. 이 여성은 다른 여자와 달리 무척 건설적이구나.’ 우에노 치즈코의 말을 인용하자면 여성혐오란 무의식, 비의지적 요소를 포함한 넓은 뜻의 용어로 가부장제 사회의 기초기제로 자리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차별적 문화와 제도를 구성하는 핵심원리로 남성으로서의 성적 주체화를 달성하기 위한 여성멸시를 정체성 깊은 곳에 위치시키고 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자신을 완성시켜 갈 때는 반드시 타자를 하대하고 배척해야 할까. 자신을 긍정성으로 자신 바깥을 부정성으로 분류할 수 없는 인간은 광인이 될까. 주체의 탄생기, 이데아가 조성되는 과정은 그렇게나 남루한 것일까.
“머슬 할라 나를 나서 가문거문 씻긴 감은 / 감은마디 타지에 두고 룡동네 날 심궈서 날 고상을 시키는가 / 엄매엄매 우리 엄매 낭심글 때 그리 없어 가시나가 물이 짓고 모시마가 동났덩가/머슬 할라 나를 나서 이런 데서 날 심궈서 나를 서러 못살것네 / 엄매엄매 우리 엄매 날킬때는 금옥같이 키웠건마는 귀댁이가 천댁이 되고 / 요내 내가 요케될줄 어느가 알았덩가 하늘아니알고 땅이나 알았덩가 / 엄매엄매 우리엄매 나는 서러 어찌 살까 엄매엄매 우리 엄매”. 전남지역의 여성민요 흥글소리는 그리움으로 친정어머니를 부르며 동시에 자신을 왜 낳았는가, 왜 이런 곳으로 시집을 보냈느냐, 원망하는 서러움을 담은 노래지만 정작 그러한 불행을 제공한 현실 즉 시집살이의 구체적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시집살이의 사실보다는 시집살이로 인해 생겨난 내적 감정을 주로 말하고 있다_이정아.
여성혐오의 반대편에는 곧장 남성혐오가 놓일 것 같지만 실상 그곳엔 남성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가부장제가 자리매김하는 동안 여성들은 남성을 지탄하는 대신 자신이 처한 고립과 폐쇄에 대해 자조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술회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이름이 지워진 수많은 여성들은 왜 이 생생한 고통에 대해 침묵했을까. 왜 이 심경을 예술로 승화시켰을까. 폭로에 따르는 무시 및 책임 전가, 2차(N차)가해 등의 물리적 한계 상황을 포괄하고도 이것은 어쩌면 여성이 주체를 만들어나갈 때 남성과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는 가설의 반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 남성혐오가 만연하지 않은 원인에는 여성이 가진 남성에 대한 공포, 환멸, 단념 외에도 다른 요소가 있을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태도로 싸우는 것을 기나긴 시간 동안 거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남성의 자의식으로 생존해 나가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진 여성들은 여성혐오를 답습하면서 결국 자기혐오에 빠진다. “여자는 그저 남자 좆을 물고 있어야 인생이 편한 거야.” 폭력과 학대가 횡행하는 섬에서 김복남이 같은 여성들에게 들은 말은 이토록 처참한 것이었다. 남성우월주의의 숙주가 된 여성들은 자신을 2등 시민, 남성하위의 존재로 손수 재편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풍토 위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수단으로,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체로 여기기 쉽다. 여성 억압과 폭력의 역사가 유장해질수록(‘여성혐오’라는 명칭만이 새롭다) 이 인식은 우리 체내의 기관처럼 아주 당연히, 의심할 바 없이 거기 있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내일도 여기는 검고 붉고 춥겠지만
며칠 전 거리에서 빈지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독일 애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햇살 아래 두 사람의 용모는 비현실적으로 빼어나보였다. 에코백과 배낭을 메고 장우산을 든 채 파견 근무를 나가던 나는 그를 바라보며 이상하고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87년생 이 힙합 뮤지션은 재능, 개성, 투지 모두가 강력한데다 그러한 자신을 잘 연출할 수 있는 영리함과 패기까지 갖추고 있어(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랄까) 현재 한국의 음악시장 안팎에서 존재를 거의 폭발시키고 있는 남성이다. 그날 횡단보도에 요단강이 흐른다고 느껴질 만큼 그와 나는 극단적으로 멀었다. 이 감상은 박탈감이 아니라 이탈감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내가 그에게 무엇을 빼앗기고 있다는 망상이 아닌, 내가 애초부터 가질 수 없던 것을 천천히 확인하는 심정이 들었던 것이다. 빈지노는 나를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아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빈지노에게 네가 감히 나를 무시해?라고 묻지 않는다. 나는 남성을 내 존재의 하위로 두는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르거나 몰랐어야 했던 남성들의 추행, 구타, 협박에 시달리며 얼굴에 피멍이 들고 앞니가 나가고 경찰서에 들락날락하며 격투기를 배우는 동안 나는 내 존재론을 구축하기 앞서 생존하기조차 바빴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날 예정이었던 사람들 중 XX 염색체를 가진 것이 확인된 이들은 아예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내 어머니의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아들이 아니라서) 기쁨이 끝났다는 뜻의 한자어로 작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교제, 결혼, 임신, 출산, 양육에 관심이 없는 여성들을 안락하게 평가하고 비난하며 훈계한다. 그것들이 우리 성실하고 충직한 남성들의 구애를 무시하며 일자리를 빼앗는다. 더 이상 남성들을 돕지 않는 행태가 괘씸하기 짝이 없다. 자기가 종년인지 모르는 여성에게는 스스로를 더 확장시킬 수 없는 시기와 조건을 주어야 한다. 이 지형도에서 어린 소녀들은 아재파탈(각종 언론은 아저씨의 낮춤말인 단어, 아재가 부상하자마자 그 뜻을 빛의 속도로 미화시키고 마침내 그들 매력이 치명적이기도 하다는 자문자답 아무말대잔치를 서슴없이 벌인다)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순댓국을 복스럽게 먹고 축구에 열광해야 한다. 박유천의 범죄는 별 일이 아니다. 김민희가 홍상수를 유혹했다. 여혐이 아니라 흔한 묻지 마다. 기득권 남성들이 기이할 정도의 힘으로 위계질서를 보수공사하면서 기형적, 퇴행적인 여성관은 다시 생기를 띤다. 우리가 이 구조의 오염도를 느끼지 못하는 한, 의심하지 않는 이상 여성혐오는 미세먼지처럼 너와 나의 정신적 허파에 차곡차곡 흡착된다. 나는 오늘, 오늘이 아니면 내일, 그 이튿날이라도 자유로운 호흡을 하고 싶다. 만약 이번 생애에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다면 다음 세대의 여성들이 지금의 여성들보다 더 쾌적한 공기를 들이마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너와 나는 계속 설치고 말하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