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술차트

처음 써 본 장르, 추천사

접골 2023. 9. 8.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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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납의 힘>

전지를 처음 만난 건 여성사전시관의 기획전 <이걸로 밥벌이를 계속할 수 있을까?>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작업을 설치하는 동안 무섭게 친해지다 정신을 차려보니 동틀 녘 전시장 셔터 앞 계단에 함께 앉아 있었다. 호러 스릴러로도 서바이벌 성장물로도 저예산 로드무비로도 손색이 없는 전시제목의 자기장에 우리는 매번 갇혀 있었고 실제로 어느 여름엔 같이 인형 탈을 쓰고 종로 한복판을 하염없이 걸으며 밥벌이를 하기도 했다. 문래의 작업실을 나눠 쓰던 어느 겨울엔 오래된 배추 쪼가리와 바닥난 쯔유로 샤브샤브를 만들어 먹었다. 돈을 벌어 온 사람이 유재하의 노래를 틀고 배낭 속의 술을 꺼내 흔들면 작업대에 앉아있던 사람이 구원받은 표정을 지었다.

전지는 합리적인 기분파로 거절도 잘했지만 강권도 잘했다. 둘이서 갑자기 노래방에, 난데없이 인천에 갈 때면 이 행성의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가뿐했다.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시청자 없는(없어야만 하는) 인생극장을 찍어가며 각자의 현황을 중계했다. 삭막한 아르바이트, 가로막혔다 풀렸다 다시 얼어붙는 작업, 친구나 가족과 겪는 시지프스적 갈등. 고구마 옆에 흰 우유를 따르듯 틈틈이 상대에게 전시와 영화와 책을 추천하는 선행은 잊지 않았다. 지나온 것, 마주한 것, 바라보는 것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 살얼음 낀 마음에 천천히 해가 들곤 했다. 짧은 머리, 노브라, 노메이크업, 운동화, 구제 점퍼, 배낭. 의례와 형식을 공포스러워하는 우리는 교집합이 넓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전지와 나는(칠월과 안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다른 성향과 체질을 가진 인간이라는 걸 실감한다. 일상이란 숭고한 똥을 쇠똥구리처럼 느리게 궁굴려가는 나에 비해 전지는 손발이 몹시 빠르고 기동성이 높은 작업자다. 외출을 즐겨하는 전지가 항상 경이로웠다. 같이 어디를 가든(반 평짜리 공터이든 막다른 골목이든) 전지는 그곳에서 반드시 아는 사람을 만났다. 폭염에도 혹한에도 전지는 땅을 밟았다. 얇은 발등이 매번 검붉은 상처투성이였다. 우리 기질을 세상 쉽게 도식으로 나타내자면 수렴/발산, 겨울/여름, 트위터/페이스북쯤으로 분리된다. 전지는 완연히 후자로 누가 봐도 성실하고 건강한 인간이다. 그러나 건강한 것과 건강하려고 애쓰는 것은 전혀 다른 상태다. 따뜻한 것과 예민한 것, 애틋한 것과 참담한 것, 솔직한 것과 무정한 것이 꽤 다른 속성이듯.

전지가 그린 풍경은 그 선명한 가시성과 알뜰살뜰한 밀집도 그리고 강렬한 현장성 때문에 사람냄새가 난다는 얘기를 듣는데 이 표현이 온정만을 뜻한다면 반쯤 틀린 말이다. 우선 사람냄새란 것부터가 복잡다단하며 체취는 자세히 맡을수록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안양을 애정보다 애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작업 면면에 ‘내 안양, 욕해도 내가 욕해’라는 심경이 보인다) 그 장면들엔 서사성이 알집파일처럼 켜켜이 응축되어 있다. 포장과 미화에는 필연적으로 생략이 따르고 매끄럽고 쾌적한 이미지란 수없는 요소를 배제해 버린 결과인 걸 생각할 때 전지는 사적, 공적 공간으로써의 안양을 별다른 정제 없이, 황량하고 울적하고 각박한 장면 모두를 포함해 정직하게 보여준다. 얼핏 경쾌하고 명랑해 보이는 정경 속엔 울퉁불퉁하고 찌그러지고 닳은 대상들이 살고 있다. 지점토로 만든 빌라 안에는 누군가 어젯밤 남은 머리 고기와 소주를 아침으로 먹고 있을 것만 같다. 볼품도 형편도 뿌리도 없는, 지난하고 아늑한 동네가 얼마나 많은 소음과 냄새와 표정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전지는 드로잉을 하며 새삼 자주 깨달았을 것이다. 혼자 수많은 외부를 관찰하며 흥미와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제목으로 정한 문장이나 글귀를 읽어보면, 듣고 말하고 재연하는 재능이 뛰어난 이 친구가 무엇을 포착했는지 무엇에 인상을 받았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세밀히 알 수 있다. 똥천을 알고 있는 아저씨의 등짝은 정말로 똥천을 알고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자세이며 박석교 아래에서 비를 긋는 비둘기들의 어깻죽지는 정말로 축축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비밀요원처럼, 독립영화감독처럼, 시사교양프로그램 작가처럼 혹은 비탈길을 오르는 길고양이처럼, 자전거의 램프처럼, 전봇대에 앉은 새처럼 동네 구석구석을 살펴봤을 전지의 모습이 화면 바깥에 내내 어른거린다.

손과 발을 직접 움직여야 안도하는 전지가 매일의 노동으로 쌓아 올린 구상의 세계는 창작자가 내부의 불안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도 일러준다. 우리는 달력이 때때로 분쇄기가 되는 걸 안다. 날카로운 날짜는 약해진 영혼 따위 쉽게 채 썰 수 있다. 그럴 때 매일의 기록은 스쿼트나 물걸레질처럼 사람을 단단하게 한다. 펜을 쥘 때마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깨끗하게 드러나는데 도망칠 곳도 없다. 화판 위로 막연하고 촘촘하고 부드러운 시간이 쌓였을 것이다. 작업이 사실 자가 치료인 걸 아는 많은 작가들은 규칙적인 일과의 치유력을 강하게 체감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강단 있는 전지가 동네를 빚어내는 동안 더욱 꿋꿋해졌다는 걸, 마음이 아주 크고 밝은 만월처럼 충만했을 거란 걸 느낀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겸허하고 담담하고 고된 이 보편의 나날이 만다라 무늬처럼 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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