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실 8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

내가 볼 때 오늘날 세계를 가르는 거대한 경계선은 보수와 진보, 부자와 가난한 자, 서로 다른 인종, 신념 들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들을 용기가 있는 사람과 이미 다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_매들린 올브라이트 이사를 하고 수술을 하고 간병을 하고 소설을 쓰고 새 일터에서 업무를 익히고 두 번째 고양이를 입양하는 동안 나는 조용한 시민 시늉을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세상사 통찰은 SNS 멋쟁이들이 대신해줬다. 일정이 없을 때면 일기에 조잡한 기분을 공들여 적고, 한 오백 년 된 지박령처럼 집에 머물렀다. 창밖에 별 일은 없었다. 매연 가득한 도심, 무심한 타인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아름다울 뿐인 한강의 야경이 가끔 그립기도 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의 삶은 의외로 ..

흡연실 2023.09.10

미안해, 얘들아

뭔가 애매하게 설명적이고, 희미하게 건전한 그림들이 학교 주변 통학로에 놓일 예정. 봄부터 경찰서에서 위기청소년들(위기는 내가 위기임)과 수상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진행하면서 몇 번이고 뼈저리게 느끼는 건 아이들이 아닌 어른이 문제라는 사실. 일의 과정이, 태도의 일관성이, 언행 하나의 진실성이 없는 우리들은 심지어 시끄럽기까지 하다. 아니 그래서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거겠지만. 이렇게 기만을 일삼으면 어른도 아이도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불쌍해지는데. 차츰 더 허약하고 불안해져서 쉬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데. 헬조선 같은 말로 문제를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싶지는 않고, 내내 고민 중.

흡연실 2023.09.10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_막스 베버

프롤레타리아들이여, 일하고 또 일하라, 사회적 부와 너 자신의 개인적 가난을 증대시키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라, 더 가난해지기 위해. 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일하라. 그러면 그만큼 더 비참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헤어 나올 길 없는 법칙이다. _폴 라파르크,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중 급작스럽고 전투적인 문구로 보이지만 다시 보면 별달리 충격적일 것도 없다. 자본주의는 그저 공기 같은 것이 된 지 오래다. TV 앞에 앉은 사람에게 광고(차승원이 이번 아사히 모델이야?)와 전쟁소식(미국이 또 어딜 친다고? 헐. 그러지 말지.)과 리얼 버라이어티쇼(유재석 엄청 잘 뛰네.)가 두 눈 위로 평온히 흘러가는 일처럼 우리는 무수한 자극을 비슷한 무게와 가치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하물..

흡연실 2023.09.10

자기기만의 방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_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중 이곳에서 많은 것이 부풀었다가 사그라들었다. 절차는 언제고 비슷했다. 비닐과 스티로폼이 굴러다니는 작업실은 천진하고 아름다웠지만 캄캄한 바람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캄캄한 공기를 많이 마시면 폐가 나빠진다고 죽은 사람이 말해주었다. 봄비가 표독스럽게 내렸다. 언 배를 타고 하염없이 같은 곳을 맴돌고 있어. 현기증이 나. 단단하고 딱딱한 것을 줄 수 없니. 나는 나에게 권유한다. 그런 것이 있긴 하지. 청산가리와 꽃나무와 삼치. 일기장엔 괴이한 문답이 쌓여가고 봄은 겨울보다 추워진다. 동전으로 담배 값을 한참 동안 모으다 누군가 소리쳤다. 너무 추워. 너무 춥다고. 너는 이 추위가 안 느껴져? 누군가는 ㅁ으로 누군가는 ㅇ으로 방향을 정했..

흡연실 2023.09.10

미션 클리어

동인천에 가서 짜장면(자장면 X)을 먹고 오기! 그게 오늘의 숙제 소림사 무술권법으로 수타면을 뽑아내는 남자를 찾아서 견출지에 제일 작게 적힌, 제일 싼 메뉴를 소신껏 주문하기 면을 다 씹기도 전에 테이블로 걸레가 날아와도 점원과 싸우지 않기 현금이 없으니 카드의 마그네틱선이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하기 1호선에 올라 아침부터 슬픈 사람들을 통과하기 불에 잘 타는 소재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만화책을 펼치기 검은 들깨 엿을 녹여 먹으면서 졸음을 물리치기 차이나타운 문화의 거리에서 500원짜리 사진을 찍기 비록 출력은 안되지만 천안문을 배경으로 선택할 수 있음 식사를 마친 후에는 요구르트 한 줄을 사서 햇볕으로 가기 공원을 한 바퀴 돌고 경인상사에서 만든 운동기구를 타기 손뼉 소리가 희미한 할아버지를 너무 오..

흡연실 2023.09.10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영화 얘기를 쓰고 싶진 않다. 아주 오래전 어느 새벽에 광주에서 본 필름. '추위는 확실히 악의를 품고 우리를 지나갔다'였을까. 가끔 떠오르는 그 대사. 느리고 끈질기던 영상. 서사는 모두 휘발하고 가뭇가뭇한 잔상만 남았다. 홍대에서 대방까지, 대방에서 홍대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서강대교와 원효대교를 달리면서. 오늘의 하늘이 이런 빛이었다. 포스터의 글씨를 모두 지우고 풍경만을 오래 보고 싶다. 쓸쓸하고 풍요롭게. 앙상하고 따뜻하게.

흡연실 202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