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 non dupes errent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_라캉
근대여, 안녕
_모던타임스의 마지막 장면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그들은 어디로 걸어갔을까. 그리고 무엇을 보았을까. 그림자를 끌고 가는 뒷모습에서는 조금쯤 가난하고 따뜻한 냄새가 난다. 막막하고 아득해 보이는 길은 금세 어둠과 피로를 불러들이고 이들은 곧 모랫길에 주저앉아 다 부서져버린 크로와상과 설탕맛 포도주를 맛보고 있을 것만 같다. 그저 아무 일 없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근대 역시 다른 방식으로 무참히 괴로웠지만, 아무리 관대하게 봐주어도 오늘날의 피로는 완전한 포화상태이다. 그것은 도저히 정답게 녹슨 형상으로 보이질 않는다. 지금의 피로는 틈과 무용성이 없는, 다만 무심으로 이뤄진 주사위 모양과 가깝다. 저자는 지금의 개개인을 성과주체로 판단하고 그 징후와 증상 그리고 간단한 자가 치료에 대한 글을 이어나간다. 근대와 현대를 극단적으로 구분한 측면이 있지만 저자의 직관과 성찰은 바로 시대의 분별에서 시작하고 그 분별은 중심 논거를 끌어가는, 지난 세기의 사상들을 비판하는, 독특한 무늬의 디딤돌로 작용한다. 자본과 시스템의 얼굴을 다소 훑듯이 쓸기 때문에 화폐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과주체의 피로가, 곧 모순의 굴레를 돌 수밖에 없는 현대 주체의 피로가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은 점 혹은 정신과 심리에 치중해 현실의 양상이 덜 드러난 점은 아쉽다. 아직 규율사회에 속해있기 때문일까.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도서이자 동시에 소수의 예술가를 위한 책이라고 느껴지는 지점이 존재하지만 이것을 단점으로 모는 것은 어딘가 부질없고 야박하며 비좁은 짓 같다. 동어반복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글의 흐름은 단호하고 간결하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읽고 난 후에 여파가 컸고 여러 권의 책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는 면에서 피로사회는 틈이 열린, 매력적인 도서였다.
어떻게 하나 우리 만남은 빙글빙글 돌고
_우로보로스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내고 자신과 결혼하며 혼자 임신하고 스스로를 죽인다. 꼬리를 계속해서 먹을 경우 마지막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에 그를 무로 여기기도 한다.
근대의 면역적 자아가 타자와 나를 분리해 나갔다면 오늘의 자아는 그런 짓을 벌이지 않는다. ‘너처럼 나도 이미 알고 있고 겪고 있고 끝낼 수 있다’는 착각이 그를 좀먹게 한다. 때문에 사소한 오류조차 낙오감과 열패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성과주체를 우울하게 하며 심지어 수치스럽게 만든다. 분노는 짜증으로, 깊은 심심함은 조급으로, 사유는 계산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영화와 티브이와 라디오가 이렇게나 우릴 다독여주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문제가 있다면 언제나 영험한 답변을 제공하는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보면 되지. 우리 곁에는 애니팡과 카카오 톡과 페이스 북이 있는데! 나는 나를 위무할 수 있는데!
진짜 미추어 버리겠네
자본은 쉽게 구조를 만들고 구조는 필연적으로 경쟁을 조성한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는 더 이상 정직한 전력질주를 강요하지 않는다. 시스템의 목소리는 더욱 교묘하고 친근하며 자연스러워졌다. 경쟁이란 타자와의 진흙탕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나 자신과의 아름다운 전쟁이 되어버렸다. 전투 중에도 우리 모두는 얼굴에 반드시 윤리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띠어야 한다. 순수한 패기와 올곧은 열정 그리고 진정성 있는 노력이 너를 구원해 줄 것이다. 더 애썼다면 더 즐겼다면 더 미쳤다면 실패 따위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진심은 통한다, 는 구호가 이렇게 잘 활용되는 시대가 있었을까.
촘촘하고 얄궂은 현대경쟁의 성격은 타자와의 관계 역시 얕고 일시적인 이해관계로 만든다. 분자화한 개인은 비인격적인 면모까지 갖춘다. 친구는 말한다. 나는 너의 안녕을 바란 거지 결단코 성공을 바란 게 아니야. 예술의 영역도 예외가 없다. 시심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이제 시까지도 전략적으로 쓴다. 2011년 H잡지 시부문 심사평의 인상적인 구절을 옮겨본다. ‘투고자들이 최근 한국시의 동향에 눈이 밝고, 전문적인 수련의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요사이 이보다 낯 뜨겁고 슬픈 문장을 읽어본 적이 없다. 취업을 미룬 채 대학원에서 유예기간을 부여받고 시를 써가는 소규모 엘리트 집단이 현재 한국 전반의 시인 지망생들 모습이라면 지나친 모욕이 될까.
그렇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세상의 종말은 한국인들에게서부터
세계의 멸망, 그것은 한국에서 시작될 거예요
_에밀리 엘 중, 마르그리트 뒤라스
한국은 규율사회인 동시에 피로특화사회, 피로전문사회로 불러도 무방한 나라다. 이곳 젊은이들은 다종다양한 피로에 쉽게 휩싸인다. 각 이데올로기 사이에 끼인 청춘 개인은 기성세대에게서 분노와 연민을 마구잡이로 느낀다. 아니 어쩌면 느낄 틈도 없이 장애물을 매끄럽게 스쳐 지나간다. 답이 없는 복잡한 문제에 노출된 그는 그 상태로 경쟁에 말려들고 곧장 위로받는다. 이 위로란 다름 아닌 긍정의 폭력이다. 숙취음료와 자양강장제 광고는 말한다. 그래도 여기 소속되어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 요즈음의 노동은 특권이라고. 넌 그나마 복 받은 거야. 갑과 을, 병과 정 노릇은 어디에서건 지속된다. 우리는 광활한 살얼음판을 쉼 없이 걷는다. 개개인의 타자화와 고립화는 더욱 강화된다. 멀티태스킹은 별난 특수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애초부터 갖춰야 할 필수 기본 자질이다.
그래, 차라리 간 때문이다
규율사회의 주체관이 나 / 너였다면 성과사회의 주체관은 나 / 내 기관이 된다. 매스컴은 말한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단지 간 때문이야. 아주 지엽적인 문제라고. 이것만 해결하면 돼. 넌 멀쩡히 계속 달릴 수 있어.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을 염두한 카피라면 이 문구는 시대를 통찰하는 명문인 셈이다. 손쉬운 책임전가는 도처에서 일어난다. 너의 곤혹은 호르몬 탓이야. 운동부족과 모자란 비타민 그리고 섬유소 탓이야. 아니지, 청춘 탓이야. 아니, 아니. 우리 유전자가 그렇게 생겼어. 그도 아니면 그래, 이게 다 MB탓이야. 사회 각계각층의 전반적인 관심과 노력, 시급한 방안마련이 필요합니다,라는 말은 애당초 사어 아니었나. 구조의 진단은 유령집단 전문가들의 것 아니었나. 멍청아, 이제 알았어? 문제는 언제나 너의 것, 너의 잘못일 뿐이라고! 시스템은 절대로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네가 감당할 만한 짐이야, 머잖아 보상받을 수 있어, 울지 마, 아프지 마, 너는 할 수 있어,라고 회유한다. 분노하는 청춘은 오래전에 끌려가 잊혔다. 피로 따위 케토톱으로 캐내고 씹고 뜯고 즐기면 되지 왜 그렇게 우중충해? 그러나 미래의 보상이 한 번이라도 구체적인 문장으로 명기된 적이 있었나. 합격과 실격의 화법 말고? 문제가 흘러넘치는 개인은 필사적으로 간접적인 삶을 열렬히 살아낸다. 나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법과 지쳤다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내 피로에는 임계치가 없다. 해소되지 못한 울분과 회피의식은 언어로 흘러들어 간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추측한다면 현대 한국어의 특성은 자음 된 발음의 발달, 강한 어감의 축약어와 괴이한 한자투의 과다수식, 수동태의 남발이 주를 이룬다. 시대상을 언어가 가장 먼저 드러낸다면, 요새의 한국어는 우리들의 피로를 우리만큼 피로하게 업고 있는 꼴이다. (피로의 사전적 뜻은 고체재료가 작은 힘을 반복하여 받아, 틈과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파괴되는 현상 또는 적에게 사로잡힌 상태와 그런 사람을 일컫는다.)
아, 기도하는 어머니
긍정의 폭력과 한국개신교의 아전인수격 결합은 여러 화학적 작용과 그 폭발력을 볼 때 가히 최악이라 할 만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상당한 피로를 유발하므로 생략하고 싶다. 스스로의 피로를 합당하게 여기는 지점을 벗어나 피로유발대상을 숭배하는 유형이 있으니 그것은 한국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일반 성과주체와 달리 육아하는 성과주체는 피로의 성격을 누구보다 곡해한다. 그는 피로를 누구보다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체다. 수동과 피동이 완전히 용해되어 한 몸이 되어버렸다. 자녀의 열렬한 신도이자 열렬한 훈육자인 주체는 강철멘탈을 지닌 투사가 된다. 희생에 대한 지나친 각오와 의미부여로 인해 피로가 물에 젖어 곱절의 무게가 되어도 개의치 않는다. 그는 그 무게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 무게를 통해 도리어 투지를 불태운다. 자기 합리화 단계를 벗어나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성과주체의 모습은 어머니의 얼굴, 긍정의 안면과 너무도 흡사하다. 희생과 양보라는 가치는 숭고하고 일면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주체의 피로를 가속화하고 그 속도를 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해롭고 가슴 아프다. 종국에 피로는 피로로 불려지지도 못한다. 그는 이 피로를 모성애라고 부른다. 모성애의 특질은 주체가 완전연소될 때까지 자신의 피로를 자각하지 못하고 끝까지, 끝의 끝까지 이타적인 이기심으로 인고하며 기다린다는 데에 있다.
가능한 평화의 예
우리 시대의 수많은 폭력적 응원 중에 단연 으뜸은 파이팅, 이라는 명령어다. 그 말은 무엇을 뭉개고 덮고 가리는 데 너무 유용하다. 분개하고 거부하고 헤매기를 권유하는 슬로건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 밤 난 울고 싶었지 그러나 꾹 참아야만 했어 난 유행가 아냐 난 제법 엄숙해
허나 나의 번뇌는 꼭 노래로만 떠돌지 미쳐도 곱게 미친 거야
_밤 그리고 또 무엇이 중, 진이정
허먼 멜빌의 바틀비가 내뱉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와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요’라는 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번역의 모호함 때문에 바틀비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할 여지는 많고 실제로 여러 해석이 가능한데, 그의 말은 한정적이고 협소할 뿐이어서 개방된 주체라는 판단이 들진 않는다. 그의 언사는 자유의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무엇을 거부했던 것일까. 어떻게 해야 자유를 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아를 열고 외출하나. 나를 어떻게 부수나. 저자는 몇 가지 대안을 내놓고 있다. 앞서 말한 깊은 심심함과 분노 외에 오래 보기 그리고 부정하기. 덧붙여 유대감이 있는 공동의 눈 밝은 피로를 겪을 것. 여기에 쓸모없이 충실하기,라는 해결책을 더해도 좋을 것 같다. 녹슨 시간은 무의식을 자극하고 무의식은 지나친 이성으로 구성된 성과주체를 묽은 존재로 변모시킨다. 너와 나 사이의 틈은 부드러워지고 날 선 자아, 무엇을 넣어도 허기졌던 자아는 가만히 이완되어 ‘내 생각을 벗어난 나’처럼 자연스러워진다. 딴짓과 딴 길 가기, 즉 낯설어지기는 단단한 주체에 균열을 만든다. 우애와 평화는 이 지점에서 생기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때 사실적으로 우리를 관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정직함과 희미한 선 그리고 강박적이지 않은 윤리감각이 생성될 때 나는 너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걸을 곳은 0과 1 사이의 무수한 길. 정말이지 나는 너와 오랫동안 길을 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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