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피터팬들
흔히 한 작가의 청년기 초기작을 그의 최고작품이라 여기는 경우가 많다. 생물학적 기력이 쇠한 작가들이 종종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산으로 들어가거나 신에게 의지해버리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역시 좋아하는 작가의 최근작을 의리로 구입해 마음이 쓰라린 적이 적지 않다. 이 소설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60세에 쓴 작업물이다. 이순(공자 왈, 예순 살부터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고 하심)이라는 시기에 비해 딱히 지혜롭거나 따스하지는 않은 책이다. 그렇지만 1964년, 60세의 그는 내가 아는 어떤 청년작가들보다 젊고 예민한 글을 썼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신문반, 민속반 등의 특활반을 이끄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탈춤, 민요, 노래, 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 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교사 *자기 자리 청소 잘하는 교사 *학부모 상담을 자주 하는 교사 *사고 친 학생의 정학이나 퇴학 등 징계를 반대하는 교사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보는 교사
_1989년 문교부 일선> 교육청 공문 내용(출처: 신동아 1989년 7월호) 전교조 교사 식별법
어떻게 지내? 조지의 그 질문에는 적들이 어떤 짓을 했냐는 뜻이 숨어 있다._p94.
잃어버린 게 10년 정도면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로 한국은 계속해서, 총체적으로 퇴보 중이다. 성급히 말해보자면 지난 5년은 물질이, 지금 5년은 정신이 좀 쓰는 것만 같다. 다음 대선을 기다리다가는 우주먼지로 화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야만적인 우두머리들은 지겹게 속삭인다. 윈터 이즈 커밍, 은유와 우회의 시대가 왔어. 우리들이 공유하는 산소에는 이전보다 매캐한 방관과 세련된 이기심이, 냉소 가득한 체념이 뒤섞여있다. 조지가 64년 한국에서 소수집단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학생에게 은밀히 커밍아웃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병원에서 치료가 되어서 나가더라도, 절대 잊히지도 않고 용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절대로 전처럼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육신은 신념을 모조리 잃었으니까._p105.
잊어버리기 어려운 사람 이야기를 또 한 번 꺼내고 싶다. 11월, 세상은 신념을 모두 잃은 육신을 보내온다. 이전에도 자기 내면을 이만큼 솔직하고 왕성하게 표현하는 음악인이 있었을까. 그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의견들, 사실 너무도 당연해서 충격적이지도 못했던 발언들이 매체에 얼마나 촌스럽게 소개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갑갑하지만 말이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건 다 떠나버리네, 세상 되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돌아간다. 나는 앞으로도 신해철로 부를 수 있는 상징과 정신이 빠른 속도로 추방될 것 같아 막막하다.
여자들은 그래. 우리 여자들은 뿌리를 내려야 해.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는 있지. 그렇지만 우리 여자를 옮겨 심는 건 남자지.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옮겨 심은 뒤에는 남자도 그 자리에 함께 머물면서, 시들어야 해. 아니, 시들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물을 줘야 해._p154.
조지의 생각으로는 여자와는 결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여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는 남자만 나눌 수 있다. 대화는 그 속성상 개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는 상징적인 만남이다._p175.
차라리 책의 불편한 부분부터 언급해 보는 게 낫겠다. 우선 비문이 걸러지지 못한 번역. 톤과 뉘앙스는 나쁘지 않은데 정확도가 더러 떨어진다는 판단이 들었다. 번역가가 오호통재라,라는 말 좀 그만했으면 싶었고 책 뒤의 광고문구, 책장 끝의 다른 책 홍보문구도 거슬렸다. 책 넘기는 감이 뻣뻣한 것도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 경험의 한계라고 치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소설 곳곳에 여성 혐오적인 서술이 눈에 띈다. 레베카 솔닛은 저서 ‘걷기의 역사’에서, 여성들의 실내성 또한 여타의 여성적 특질과 마찬가지로 학습된 면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밝힌다. 물론 작가는 인간존재의 쇠락과 그 고독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소설이 정치적으로 늘 공정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이런 부분이 아쉽고 유감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우리는 여자들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다, 와 같은 자조를 이해하면서도 여성의 권리와 역사는 따로 한 번 짚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60세 게이와 아프가니스탄의 14세 레즈비언 중에 누가 더 약자인지를 헤아려보자는 게 아니라, 소수집단 안에서의 분열과 적대시는 폐쇄적인 동시에 위험하다는 의미에서다. 동성애자의 정체성은 사실 아나키스트와 가깝다. 후세를 남기지 않는, 넓게 보면 자살로서 삶에 저항하는, 국가가 곧장 걷어내고 싶은 집단. 돌이켜보면 수용소 안에서의 싸움이 가장 처절했고, 왔던 길로 돌아가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의 애인을 좋아할 남성이 나를 미워할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찾아보니 콜린퍼스 주연의 영화 싱글맨이 있었고(아직 못 봤다), 팟캐스트 빨간 책방에서 에브리맨과 이 책을 동시에 소개한 적이 있었다. 김중혁은 이 책의 키워드를 ‘소수집단, 육체, 마모’로 꼽았는데 나는 엇비슷한 맥락으로 ‘소년, 변절, 고립’이라는 단어를 택하고 싶다. 크리스토퍼의 책은 이 한 권 밖에 못 접했는데도 굉장한 기시감과 반가움이 들었다. 홀든 콜필드가 성인이 되면 조지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도 함께 생각났다. 주인공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가 계속 훼손되고, 그 상실을 충격과 비애 속에서 관찰하는 서사가 흡사하다. 1인칭의 시니컬, 블랙코미디식의 화법은 형식상의 공통점이며 이 투가 세계관까지도 이어진다. 내게는 이 이야기들이 레이먼드 커버 군의 소설보다는 호감이 간다. 거장들의 묵직한 존재탐색도 감동을 주지만 이렇게 자분거리는 감정을 본격 나노서술하면서 냉정한 분노와 건조한 유머를 내보이는 태도는 유독 인간을 열렬히 관찰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들의 작업은 어쩐지 식견, 이론, 의견이 아닌 진짜 자기 생각일 거란 짐작이 드는 것이다. 쓰는 게 아니라 잡아채 옮긴다는 느낌이 강하다. 심장박동이 가득한 이 감각은 생생하다 못해 저릿하기도 하다. 조지는 무엇을 한다,라는 냉랭한 문장들도 실은 인간을 철저하게 살펴보겠다는 뜨거운 역설로 다가온다.
그래도 나이 든 사람한테 화날 수 있잖아. 나이 든 사람은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날들만 붙잡고 있으니까._p179.
가만 보면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세고 무서운 건 관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함수 관성에 상수 몰이해가 들어가면 인간은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격리시키는 꼴이 된다. 게이+노인=약자,라는 판단도 편견일 수 있으며 우리는 가끔이라도 편견과 사실, 차별과 차이, 직관과 속단의 다른 점을 곱씹어 봐야 한다. 어떤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은 폭력일까, 개성일까. 가두리 양식장 같은 시선은 독보적인 통찰일까, 타성 어린 합리화일까. 나는 병원 입구에서 원장과 인사할 때만 해도 청자 속의 난초 같던 노인이, 커튼 안에 나와 단둘이 있을 때 돌변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남성의사가 아닌, 여자 아르바이트생 앞에서는 본색을 허물없이 겸허하게 드러내시니 나같이 소설과 만화를 만드는 염탐꾼에게는 인간본성을 현장에서 탐구학습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뿐이다. 쥐처럼 교활하고 날렵한 안구의 움직임(이 비유도 관성인 게, 사실 쥐 눈은 까맣고 맑다), 그가 느끼는 날카롭고 섬세한 피부의 감각들. 나를 하대하고 괄시하는 그들의 오만한 태도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이미 사파리 같은 사내 정치와 텃세에 기가 쇠해있다). 놀라운 것은 내가 그 순간에야 그 노인이 감정과 욕망이 있는 인간, 살아있는 인간이란 것을 새삼 깨닫는다는 사실이다. 연장자 집단에게 화가 나고, 우리 세대 그리고 나부터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는 일이 빈번하면서도 노년 개개인의 감정에는 두 눈과 귀를 막아버리곤 했던 것이다.
조지는 그 사람들과 다르다. 그 이유는, 어떤 식으로 정의될 수는 없지만 벌거벗은 조지를 보면 금방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조지는 포기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조지는 아직 경쟁을 하고 있지만, 동년배들은 아니다. 조지가 시든 청년의 분위기를 갖춘 것이 신비가 아닌 허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주름, 늘어진 살, 하얗게 새는 머리카락, 앙다문 입술, 짐짓 꾸민 활기 등에도 불구하고, 가끔 어렴풋이 유령처럼 다른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부드러운 얼굴의 천진하고 예쁜 소년의 모습이. 그 모습은 중년의 진짜 나이보다 더 오래되어 보이며, 그 둘의 조합은 기묘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습은 분명 조지 안에 있다._p118.
윗몸일으키기 하지 마, 허리에 오히려 안 좋대. 꼬리뼈 다 나가. 헬스장에서 무리를 하는 조지에게 뼈가 닳으니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입을 닫고 있을 것이고 조지도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내가 불편할 것이다. 우리는 이상한 자세로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어정쩡한 동안, 나이에 맞지 않은 괴이한 차림, 쓸데없이 충만한 헛짓거리, 캄캄한 미래, 비생산성, 우중충, 비루, 잉여, 한심.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칭하는 세상의 부정일색화법은 상상 이상으로 무참하고 잔혹한 동시에 심지어 욕하는 대상에 대해 죽도록 무지하고도 무관심하다. 오늘처럼 내일도 그럴 것이다. 외면과 기존 인식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행태는 너나 할 것 없이 밥 먹듯 하는 일이다. 그러나 관찰에 게을러질수록, 사람과의 대면에 부주의할수록 인간은 보수적으로 바뀌어간다. 55년생 우리 아빠는 아직도 아저씨처럼 보이는 게 싫어 남방을 입을 때마다 바지 바깥으로 옷을 뺀다. 친구는 아빠가 퇴직 후 경비실에 앉아있기 무섭다고 자기 앞에서 울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지하철에서 어깨를 쳐대고 다리를 쩍쩍 벌리는 중년들을 보며 화가 치민 적은 많지만 목과 허벅지를 움츠리고, 변태로 오해받을까 고개를 떨구고 다니는 중년들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이들의 소년성에 유심한 적이 있었을까. 나만 사고한다고, 나만 날카롭다고 착각한 시간들이 지나치게 길지는 않았을까.
주인공의 하루를 따라가는 이 소설은, 조지가 눈을 떠 강의를 나가고 병문안을 가고 친구를 만나고 학생과 술집과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종국에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에게 잠자리를 빌려주겠다고 말하고 홀로 머물면서 끝이 난다. 소소한 일상마다 쓰디쓴 열패감을 맛보며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 적고 있다. 사건이 없다고 혹은 너무 많다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너무 많은 사건이란 건 사실 일상이고(하루, 하다못해 인상적인 3분 정도도 서사가 일어나기 충분한 시간이다. 작업자들은 어디에나 꽉 들어 찬 서사를 편집하는 것이 업일 수 있다) 작법 상 큰 사건이 없을 때는 모든 빛을 다각적으로 튕겨낼 수 있는 인물이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사회적 격동기 또는 특기할만한 역사적 사건들은 소설 환경의 주제나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전후 상황 속의 개인이 그렇다. 싱글맨은 미시, 미시, 미시적인 상황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를 전하고 있다. 아주 구체적인 정황을 단독자의 관찰, 감정의 탐색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데 요소의 반복, 확장, 강조를 통해 큰 효과를 낸다. 병상에 누워있는, 죽은 애인의 애인, 우정이라고도 칭할 수 없이 앙상하고 초라한 나머지 애틋한 친구, 젊고 매력 있고 애인도 있는 자신의 학생. 우리들이 길에서 만날 조지는 계속해서 쓸리고 지워져 잘 보이지도 않는 인간이다. 가치 있는 대상들의 실종, 사랑하는 풍경의 소멸, 이들과 함께 익숙하게 밀려나는 어떤 시절. 소년, 변절, 고립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해 본다면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이 그를 둘러싼 변절 속에서 고립되어 가는 이야기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좋아하던 카페, 식당, 술집들이 족족 망해가는 것은 왜일까. 거기 발걸음 말고 마음만 갔기 때문일까. 수줍고 꼼꼼하고 내성적인 자영업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홀로 조용히 아름다웠던 것들은 다 언제 빛이 바랜 걸까.
특별히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닌 의식, 모든 사람과 모든 것,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은 의식, 가장 높이 뜬 별까지 쭉쭉 뻗는 의식. 우리는 직감으로 분명히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조의 어둠 속에서 이 생명체들 몇몇은 웅덩이를 빠져나와서 더 깊은 바다로 떠돌아다닌다고. 그러나 떠돌던 생명체들은 낮이 되어 물이 빠지면 되돌아올까? 무엇이 그 생명체들을 잡아들일까? 그 생명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가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아니, 그 생명체들에게, 바닷물은 웅덩이 물과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를 빼고, 이야깃거리가 있기나 할까?_p.212.
작가는 책 속에서 미리 이런 대답을 해 주었다.
흔히 그러잖아요. 나이를 먹으면 경험이 늘어난다고. 그래서 좋다는 뜻이잖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경험이 쓸모 있나요?
글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전혀 현명해지지 않았어. 내가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건 사실이지. 그런 일을 다시 마주하면, 혼잣말을 하겠지. ‘또 나타났군’이라고. 그래도 도움은 안 될걸. 내 견해로는, 내 개인적으로 보자면, 나는 계속 점점 더 철없고 또 철없고 또 철없어져. 그게 사실이야.
그럼 경험은 아무 쓸모도 없나요?
아니, 그런 말은 아니야. 내 말은, 경험을 이용할 수 없다는 뜻이야. 과거의 경험을 이용하지 않으려 하면, 다시 말해서, 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그 일을 그때그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게 오히려 경이로울 수 있지._p183.
'치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Side B, 최근성 (0) | 2023.09.11 |
---|---|
소녀들의 심리학, 레이첼 시먼스 (0) | 2023.09.11 |
마이크로 소프트 룸 (0) | 2023.09.10 |
피로사회, 한병철 (0) | 2023.09.10 |
달력 그림 (0) | 2023.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