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실

Side B, 최근성

접골 2023. 9. 11. 02:13

좋은 소설은 서사도, 반서사도 무화시키며 단단한 현실을 자신의 문법으로 뚫고 나가려는 우습고 슬픈 싸움이다._김태용

오해하기가 쉬운 소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과도한 데다 비효과적인 언어유희에 눈썹을 긁었고, 뒤이어 시와 설명이 뒤죽박죽 엉겨있는 문단들에 놀랐죠. 작가의 정체성과 작가가 택한 형식이 엄청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가 누구와 왜 싸우는지 잘 보이지 않았어요. 말하자면 스타크래프트 화면을 처음 맞닥뜨린 사람처럼 이 소설을 읽기 힘들었던 거죠. 이 작가는 왜 이걸 노래나 시나 희곡으로 드러내지 않은 거지? 그림, 사진, 무용 같은 채널로 대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 자세로 아무 무기도 없이, 소설과 비평이라는 불리하고 고되고 지루한 전쟁터에 나와 있는 거지? 주체에 대한 반감과 저항으로 B를 만들어냈다지만 B가 더할 수 없이 서술자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람? 무례하고 기초적인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말해 이 희한하게 오만하고, 기묘하게 재미없는 소설에 끌리기 시작한 거죠. 문제를 기필코 독해해 내겠다는 노량진 수험생의 경건한 마음가짐은 아니고, 순전히 소설이 흥미로워서 다시 Side B를 마주해 보았습니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니다._노자

형상하지 않고 형상함, 드러내지 않고 드러냄, 쓰지 않음을 씀. 저는 소설 옆에 다시 이런 메모를 적었습니다. 글도 사람도, 한번 더 읽을 때마다 한번 더 오독하게 될 수 있겠습니다만 처음에는 못 봤던 소설 속 청사진 혹은 소설의 동기가 아주 조금은 보일 것 같았습니다. 결국 사람은 어떤 사안이든 저마다 자의적 해석을 하기 마련이며 그러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어렵기에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소설에서 Side A에 속하는 장면은 아마도 주인공이 샌드백에서 꽃 한 송이가 핀 것을 발견한 순간일 것입니다. 의미가 무의미의 통로로, 무의미가 의미의 통로로 움직일 수 있는 그 몇 초, 허무와 슬픔과 환멸과 처참이 응축된 그 지점은 농도 짙은 서사성이 탄생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의미망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짐승처럼, 이 장면에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합니다. 도망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거기에 침을 뱉고 모래를 흩뿌립니다. 소설가가 문장들이 형태를 갖춰 방향성을 가지고 성장하는 과정에 진저리를 친다면, 소설이란 것을 축조하지 않고 인식 자체로 곧 작가의 육체성으로 드러내려 한다면, 그러니까 소설 속 표현대로 서사를 그냥 무시하는 방식으로, 욕망을 우회하여 욕망으로 만드는 방식을 거부한다면, 그 자리엔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요. 

좋든 나쁘든 '구조'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 그릇에 채워질 각각의 이야기로 인해 '구조'가 일그러지기도 하고 변형되어 이질적인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구조'에서 결합될 부품은 다른 곳에서 빌려온 정크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구조'역시도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각각의 창작자에 의해 개별적으로 이야기될 때마다, 고유의 이야기는 성립한다.(중략) 다만 갑자기 아무 절차도 없이 '자기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속에서 이야기한다는 부자유스러움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조라는 것은 다루기 까다로운 자신을 컨트롤함으로써, 혹은 그릇을 만듦으로써 존재하지 않던 '나'를 그곳에 불러들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적인 작가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이야기하는 기술'은 갖고 있어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_오쓰카 에이지

논플롯도 사실은 플롯이다,라는 소설창작론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완전히 다른 국면의 얘기를 하고 싶어요. 저는 인간이라는 장르의 진부함을 이토록 면면히 보여 준 소설을 본 적이 없습니다. 더불어 독자를 이렇게 선별하고 시험하는 작가도요. 힙합은 논외로 둘 수 있어요. 이 소설은 음악의 영역보다는 관념의 영역, 구체적으로는 언어구조자체 또는 사고실험에서 살펴봐야 더 흥미로운 측면이 있습니다. 다시 읽은 Side B의 문법은 그런 면에서 1차적 기술이나 전략이 아니었고 단순한 소재주의, 아이디어리즘으로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시도한 게 아니라는 뜻이죠. 액션을 가져와볼게요.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와 류승완의 예를 들어보자면, 앵글=스킬이 아니라는 점이 더 명백해집니다. 류승완의 액션이 액션서사 그 자체에 집중해, 싸우는 사람들의 피투성이 얼굴과 동선을 화면에 성실히 담아낸다면 다르덴의 액션은 중성적이며 건조한 원경처리입니다. 싸우는 사람들이 멀리 점으로 나오거나 희미한 소리만 들리는 식이죠. 그들이 싸우는 장면은 필요하되, 그것을 굳이 카메라에 담아내진 않겠다는 말인데 제게는 이 위치선정이 지지부진한 인간사를 가까운 거리에서 재현하는 대신 한 걸음 물러나 관망하겠다는 감독의 주장으로 읽힙니다. 그래, 얘네들 싸우고 있어. 너도 알고 나도 알지. 이건 우리 인생처럼 특별할 것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아. 그냥 그렇다고. 이 태도에 설득되는 이유는 스크린에 갈등과 구체 대신 자리한 허무와 진실이 뜻밖에 풍요로운 양감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수사적 외피와 달리 이 소설을 끌어가는 내내, ‘그냥 그렇다 치자’는 작가의 내면적 태도도 사실 매우 실제적이며 냉정합니다. 이렇듯 작가가 피사체를 택하는 자리와 시선은 우연이나 즉흥이 아니며 그 자체로 작업관, 가치관 나아가 세계관을 드러냅니다.

줌인:         여럿->한 사람->한 얼굴 속에서 눈빛 등으로 시야를 좁혀감
타이트샷:  표정 등의 오랜 관찰
풀샷:        여러 대상이 있는 넓은 공간을 한 프레임에 담아냄
부감:        위에서 아래를 찍음

나는 고민을 한자로 쓸 때 ‘苦悶’이 아니라 ‘高悶’이라 쓴다는 것도 기억해 두시고
‘외롭고 낮고 쓸쓸한’이 아니라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시고

멀리서, 위에서, 곧 대상을 부감으로 대하는 이 소설에서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필연적입니다. 이 거리 때문에 남자의 얼굴은 활자로 가득 차 있고, 여자의 얼굴엔 구멍이 없죠. 그러나 난폭하고 앙상하고 폐쇄적인 이 싸움에서, 작가는 적어도 끝없이 진실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은 슬픔이며, 슬픔을 대할 때의 자세는 저마다 달라 어떤 이는 그 정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어떤 이는 그 입구에서 주저하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등을 돌려 풍경에서 빠져나옵니다. 풍경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반성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이 습관이 오래되면 인간은 초라하고 오만하게, 다정하고 쇠약하게 변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과의 투철한 맨몸싸움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는 그래서 콘티와 스케치와 씬 넘버가 어지럽게 인쇄된 만화지, 무대가 아닌 무대 뒤, 노래가 아닌 허밍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모든 완성작에는 일정량의 타협과 허위성이 따라붙고 이것을 상대해 싸운다고 더 정직하고 윤리적인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Side B는 그 성과와 미학을 떠나 작가 자신의 전환점이 되는 문제작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체, 행위, 서사에 대해 이렇게 저항하는, 이런 식의 자기 텍스트로 벌이는 원대하고 치열한 실험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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