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준비 없이 밤의 모란시장을 걷는 게 아니었다. 주차장 공터 한복판에 들어왔을 때에야 오른쪽 상가변의 철창과 자루가 눈에 띄고 개들이 앓는 소리가 들렸다. 좁은 쇠창살 안에 아무렇게나 우겨진 그들의 모습은 보자마자 단념하게 되는 어떤 참담 그 자체여서 더 이상 그쪽을 바라보기가 힘겨웠다. 아스팔트는 영원히 이어질 듯 길었다. 나는 시력이 몹시 안 좋았던, 안경을 맞출 돈이 없었던, 그래서 학창 시절부터 죽는 날까지 세상으로부터 내내 떨어져 나왔던 어떤 사람을 생각했다. 마지막 일자리라 생각한 공장에서도 역시 시력 문제로 쫓겨난 그는, 결국 이 새까만 공터만큼 넓었던 여의도 광장에서 훔친 차를 몰고 햇빛 아래 웃는 사람들을 향해 돌진해 버렸다.
한 번을 짖지 못하는 개의 공포와 불안을 이제 와서 어느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의 죄는 다 어디로 갈까. 이 참혹은 어디로 흘러갈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함께 의논해 볼 여지가 있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다짐 뒤가 기억나지 않는다. 문은 열고 들어 간 순간뿐 그 후의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표식을 해두고 이어가지 못했다. 창간호 대부분은 폐간호가 되어버렸다. 레이첼 시먼스의 저서 소녀들의 전쟁은 내가 더 이상 문제만 내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더는 완강기를 타고 미끄러지지 못하도록 손목을 잡는다. 구체적인 경험을 대, 박문영! 똑바로 말해봐, 문영아, 정말이지 괜찮아,라고 말하는 저자의 태도가 정신없이 상냥하고 집요해서 응하기 시작했는데 왜일까. 대답할수록 막막한 건. 중요한 말을 공들여하고 싶을 때마다 헛소리를 뱉는 나는,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다 결국 폭발장치와 이어진 파란색 전선을 끊어버리곤 했다. 쾅쾅! 자꾸 너도 나도 사라지는 최악의 선택지로 손을 뻗었다.
Q 너 한공주 봤다고 했지? 어땠어? 난 진짜 싫었어. 감독이 너무 비겁해. 어떻게 그렇게 수동적으로 아무 의견 없는 척 카메라를 돌리지?
A 글쎄, 막막한 풍경들로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 공주라는 인간과 그 주변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조명하면서 문제가 드러나게 하잖아.
Q 그러니까 조심조심 그 애를 따라가서 뭐? 그렇게 보여주기만 하면 끝인가?
_언젠가 영화 얘기를 나누다 화가 난 친구와의 대화 중
귀납, 나열, 동어반복으로 엮인 이 책은 수없는 예시들 때문에 거꾸로 이 예시들이 어떤 무게와 의미를 갖느냐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이런 주제는 학술서 말고 여러 예술매체에서 수많은 예시로 드러났는데. 그러니까 그다음 이야기는? 죽거나 망하지 않은 그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는데?
나 그때 진짜 힘들고 아팠거든(야, 너는 염치도 없냐).
그랬구나. 미안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네 잘못이 맞지만).
치약을 짜기는 쉽지만 그걸 다시 구멍으로 넣을 수 없듯이 우리의 무혈사태에서 부서진 자아상의 앞니와 복사뼈 조각은 이제 찾을 수도 없다. 어리석은 네 표정과 동작을 나는 이제 너무도 잘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뒤늦은 후회와 사과는 무슨 소용이 있던가. 아니 입장표명과 속죄 없는 종전은 얼마나 많았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싫어 버스에 급히 올라타던 너/나. 사과(ㅠㅠㅈㅅ)를 하고 모든 과오와 죄책감이 사라진 듯, 다시 금속멘탈로 갱신해 사이보그처럼 움직이는 너/나. 네가 거품을 물며 욕하는 그 사람이 너와 꼭 닮았다는 사실을 결코 모르는 너/나. 내면의 도플갱어인 너와 말조차 섞기 싫은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어떻게 말했지? 말끔한 얼굴로 괜찮아, 들어가 봐.
0을 아무리 많이 더해도 절대로 하나의 단위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똑같이, 하나의 공동체의 가치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공동체로부터는 그 환경의 암시적인 영향을 능가하는 것은 어떤 것도 기대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개인들의 내면에서 진정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한 변화들은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개인적 접촉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개인의 영적인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집단으로 이뤄지는 공동체적 세례 또는 기독교적 세례로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공동사회의 이상은 정작 주인공을 빠뜨리고 있다. 그 이상을 뒷받침해야 할 개별적인 인간 존재를 간과하고 있다는 뜻이다._칼 구스타프 융,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중
뇌과학, 인지심리학 분야에서는 마음이 뇌에 있다고 말한다. 10대 특유의 질풍노도는 사실 전전두엽피질의 미성숙 상태에서 비롯된다. 이 부분이 이성을 관장하는데 소년, 소녀의 피질은 성장 중이고 대신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가 10대를 지배한다는 이론이다. 남성은 이 시기에 테스토스테론까지 분비되니 그 또래의 무질서한 감정표현 양식은 역설적으로 호르몬의 질서를 착실히 따른 결과인지도 모른다. 하여 진부하게도 대부분의 남학생은 서열을 정하고 여학생은 단짝을 찾는다. 그런데 호르몬 탓을 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우리는 이제 겨우 남아와 여아의 청소년기 병리증상이란 외출혈과 내출혈로 나눌 수 있다,라는 첫 문장을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내출혈은 오랫동안 출혈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 왔고 여성의 욕망도 적거나 없는 것으로 취급되기 일쑤였으며 여성의 히스테리나 노이로제 같은 질환은 오랜 세월 병명 없이 한가한 꾀병으로 불렸고 역사 전반에 걸쳐 왈가왈부 댓망진창, 그러니까 남성팀 대 여성팀, 피해점수는 몇 대 몇! 식의 불행배틀을 벌이자면 논의는 곧 산으로 향할 것이다. 나는 다만 ‘교육받은 여성은 많은데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여성차별은 심한 국가에서 여성의 자각과 저항이 없으면 그게 이상하다(김창환)‘는 지점에서부터 페미니즘을 천천히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의 욕망은 계량화할 수 없고 그것이 내재화, 축소, 왜곡되면 다른 길목에서 다른 형상으로 어떻게든 튀어나온다. 그리고 대체로 힘이 다른 경로로 돌아 나타났을 때 상황은 더 안 좋아지곤 한다(어린 시절, 비좁은 계곡 급물살에 떠내려가다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적극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먼저 ‘성숙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의심해야 하며, 성인 행세를 걷어치우고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박근영).
책 속 공간은 소녀들의 세상이기도 하며 눈치 보는 자아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저자는 가/피해 여아들이 느끼는 고립에 대한 강렬한 공포, 소음 속에 방치된 여아 개인의 고독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레이철 시먼스에 의하면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을 기피하고 관계지향성이 높은 여성들, 관계지향성이 높기 때문에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을 기피하는 여성들은 실제로 우회공격에 능하며 그 기술이 치밀하고 교묘하다. 때문에 여성들은 대외적 자아보다 은폐된 자아가 더 비대할 수 있는데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 자기감정을 꾸준히 희생할수록 이 악순환은 심해진다. 욕구를 투명하게 내비칠 수 없는 자아는 자꾸 매끄럽게 짜부라져서 결국엔 지시하는 바와 함의하는 바가 다른 언어, 다른 표정, 다른 행위를 일삼게 된다. 나아가 누군가를 혹은 무리를 조종(권력+수동성)하는 법에 능숙해질수록 주체는 굴절된다. 정직성이 자리해야 할 공간에 히스테리와 과장, 오류와 피해자 논리가 튀어나오며 종국엔 너에게 공명하지 못하고 나의 프레임만으로 세상사를 주장하게 된다. 자기 인식, 자기 지식에 대한 점검이 부재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한 인간이 아닌 그 앞의 차고 납작한 거울로 느낀다. 볼이 상기된 너는 지치지도 않고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옳은 사람이 누구지?
칼 융은 사람들이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말하자면 내면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인간들 사이의 투쟁은 불가피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인간의 내면에는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인 또 다른 인격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대개 그것을 억누르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그림자를 반대편 사람의 내면에서만 본다는 것이다. 이런 투사가 인간 세상에 온갖 분열을 낳는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_융의 같은 책 서문
내 편으로 만드는 게 훨씬 쉬워요. 그래야 내가 옳은 사람이 되니까요._본문 중
저자는 소녀들의 집단따돌림은 갈등의 직접적 표출이 금지되는 환경에서 자생하는, 관계 생태계의 산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압사당한 이의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할 수 없는 것처럼 이들의 공격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난해한 양상을 띤다. 계속해서 저자에 따르면 소녀들은 남자를 사랑하기 전에 서로를 사랑하고 그것도 엄청난 열정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자기, 자기감정, 자기 욕망에 대한 깨달음은 관계라는 가치의 하위 목록에 배치되고 그마저도 소홀히 취급당해 일종의 정신혼란 상태가 정상 상태로 자리한다. 자기 현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명명하고 재구성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은 자존감을 서서히 시들게 하며, 그 와중에 관계가 틀어지면 관계는 즉시 가장 날카로운 칼날로 변모한다. 서로의 상처는 조롱거리가 되고 그 과정과 결과 전반은 각자에게 은밀하고 깊은 상흔으로 남는다.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는 자존감이 심하게 훼손당한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얼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다 지나갈 거야,라는 말이 분노를 사는 것은 그들의 얼굴이 가면인 탓이며 그들이 겪은 그 시간이 여태껏 하나도 안 지나갔기 때문이다. 없던 일로 치면 돼, 아무것도 아니었어,라고 하면 가해자는 가해행위를 반복하게 되고 피해자는 무력감을 느끼며 묻게 된다. 그럼 너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까? 새털같이 가볍게 흩날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면. 네가 알아서 성격을 고쳐야지,라는 말 또한 2차 폭력으로 자존감이 낮아진(피해자는 자존감이 애초부터 낮은 상태에서 공격을 받는 게 아니라 공격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지기 마련이다), 더 이상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의 정서를 더욱 냉각, 위축시킨다. 선생님은 웃기만 하는데. 엄마가 알면 안 되는데. 게다가 가해자만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는데.
살기 팍팍한데 위로 분출할 용기나 근성이 없으니 약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수평폭력이 나타나. 여성, 장애인, 동성애, 외국인 등 소수와 약자끼리의 동족혐오가 그 현상._진중권(정확한 언사는 아님)
'노인빈곤, 여성차별,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이를 비롯한 노동시장 내 불평등, 청년기회 부족 등등의 핵심문제는 우리가 달성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서로의 마음을 좋게 해 가지고 모으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셔야 될' 국가 한국에서, 학교폭력은 계층 간 긴장, 소득 불평등과 비례한다는 연구결과는 특기할 만하다. 개별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동물인 우리 각각은 이 같은 영향권 아래에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크고 작은 압력을 받고 있다.
사회 부재, 오류 상태인 시대기조와 계층 간 몰이해
학교와 가정 및 이해집단 오용, 오염된 교육과 폭력에 둔감한 환경
개인 힘의 낙차에 의한 충격을 흡수
우리들의 불행은 대부분 남을 의식하는데서 온다(쇼펜하우어). 통계적으로도 소득불평등이 큰 폭으로 갈리는 경계지역에서 갈등은 심각한 양상으로 고조, 폭발되곤 한다. 이 사이에 끼인 문제적 개인들은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을까? 생물학적 여성이자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집합에게 다 같이 구호를 외쳐볼까. 이제 주체적으로 삶을 관장하세요. 갈등에 대해 발언하세요. 먹지 말고 자존에 양보하세요. 자존감은 안정정 애착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불안은 기질적으로 타고나지만 애착은 부모의 영향이라는 것이 학계 내외의 지배적 이론이다. 그러나 이는 육아를 주로 맡는 어머니에게 죄책감과 중압감을 필요 이상으로 부가하는 측면이 있으며 미성숙한 어머니 개인 또한 자신의 가계를 통해 미성숙한 관계를 물려받았을 확률이 크다.
주체성에 대한 담론이기도 한 이 책은 역으로 주체를 강조하느라 여성과 여성이 처한 환경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 이는 좋은 문장은 정확하고 간결한 단문이라고 배운 작가들이 그들의 주절주절한 수동태에 붉은 줄을 긋고 능동태로 교정하려는 일과 비슷하다. 문장은 분명 나아지겠지만 모든 이가 명확한 문장을 쓰는 세상도 기이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남성과 삶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는, 가치관과 생의 태도가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여성에게 일면 남성적이고 서구적 성격을 띠는 합리적 판단과 명확한 욕구 표시를 요구하기는 곤란하다. 태생 자체가 곡선인 사람에게 직선으로 살라고 권장하는 것은 부당한 측면이 있는데, 남성들이 직선적 화법을 노력해서 쟁취한 게 아닌 것처럼 여성들에게 간접적 화법을 버리고 다이렉트 아우토반을 택하라고 주문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덧붙여 우회한다는 것은 반드시 비정직한가. 교육, 문화, 환경, 형질, 성장 과정의 경향상 직선로보다 우회로가 발달한 여성에게 있어 이러한 특성은 여성생태계 내부에서도 줄곧 비난을 받는다. 우회로 길섶에 있는 배려, 돌봄, 공감, 명민함, 인내를 말하는 대신 우리 사회는 모성을 숭앙하거나 비하하는 2개의 남성 중심 프레임으로 여성들을 대하는데 익숙하다. 비가시성과 모호성, 어떤 일을 유보하는 일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게 매번 뿌옇고 예민하고 비열하게 비친다. 우리가 망친 그 수많은 토론들은 이 몰이해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하나의 성별로 태어나 그 성을 수긍한 이상 성별차이의 총체적 이해란 불가하다. 공감의 토양이 척박한 여기에서는 그래서 내키는 대로 소통이란 단어를 남발한다. 빠짐없이 의견을 말하고 그걸 듣는 훈련인 경청이 취약한 사회에서는 명령형 멘토가 우후죽순 생겨난다. 발설과 대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로의 표현방식을 천천히 학습할 때만 향상될 수 있는 것이 정서지능 아니었나. 정직의 다른 이름은 존중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음성의 색채만큼, 정직함의 통로도 하나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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