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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박물관 탐방기

접골 2023. 9. 8. 00:22

불볕 여름날의 청탁 원고. 편집된 잡지버전 대신 취재원본을 올려봅니다.
인쇄물에 새겨진 자장면이란 단어가 마음 아파서. 허허.

칸 밖으로 나와 말을 거는 친구들이 있는 곳_한국 만화 박물관

 

만화, 아름다운 생명체_

요 근래 일기예보는 꽤 정확한 편으로 탐방 당일, 불볕더위 소식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폭염 속에서 기상청의 진심 어린 조언대로 자외선 차단제를 얼굴에 덕지덕지 문댄다. 불길한 흑백만화의 불우한 조연처럼 보이는 사람이 거울에 서 있다. 밀반죽 같은 낯으로 버스에 올라 새삼 만화를 생각하자니 어쩐지 기묘한 심정. ‘만화나 그려라, 만화 같은 상상하고 있네, 너 만화 그만 안 봐?!’ 실제로 만화 나부랭이나 그리고 앉아 있는 나에게 이런저런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깟 편견 정도야 이제는 김장철 동네 아주머니들이 배추 솎는 소리처럼 정답고 훈훈하기까지 하다. 시시껍절한 선입견부터 뿌리 깊은 오해까지 만화는 온갖 괄시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 사랑받아 온 매체다. 흙탕물 속에서 실똥을 매단 채 유유히 헤엄쳐가는 비단잉어처럼 만화는 조금쯤 둔감하고 무심하지만 아름다운 생명체로 우리 곁에 있었다. 허허실실 속없고 어리숙하지만 줏대 있고 정 많은 친구. 오래 만나 온, 헐렁한 동창을 보러 가는 심정으로 부천에 간다.

 

한 걸음 한걸음 따라가 보는 만화의 발자취_

건물의 위용과 달리 내부는 매우 안락하다. 총 4층으로 이뤄진 만화박물관은 그 구성과 안배가 퍽 착실하고 성의 있어 관람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주 전시는 3층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매표소에서 에스컬레이터를 거쳐 가장 먼저 다다르는 곳이 이곳의 기획전. 현재는 ‘야생화 찾기 만화여행’ 전이 열리고 있다. 기간은 올해 8월 5일까지로 다양한 만화가들과 압화작가 등이 참여해 만화와 생태가 결합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소박하지만 치열해 보이는 식물일지부터 곱고 정성스러운 꽃그림들까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동공이 열린다. 기획전시실을 나오면 대형 티브이로 거대한 한국화가 보인다. 가만히 보면 한국화 속에서 익살맞은 만화 캐릭터들이 곰실곰실 움직인다. 헬리콥터가 날고 사공이 배를 젓고 꺼벙이가 뛰어다니는 이이동시의 현현. 티브이가 과열된 것은 아닌지 합선 위험은 없는지 주부 9단의 심경으로 화면을 쓸어본다. 별일이 없다면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상설전시 ‘한국만화 100년의 발자취’가 시작된다. 1909년 최초의 만화부터 지금의 디지털 만화까지 역사적 사료가 그득하다. 만화시장의 전성기와 위기 그리고 현재를 발걸음에 맞춰 살펴볼 수 있다. 이도영의 시사만화와 안석주의 만문만화는 지금 보아도 굵직한 개성과 매력이 넘친다. 천천히 걷던 남성 관람객 한 명이 이렇게 말한다. “일본과 미국만화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우리 만화도 이렇게 많았구나.”

 

어린이 그리고 한때 어린이였던 모든 어른에게_

한국만화박물관에 안착한 상설 전은 이전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만화 100년’ 전시에 비해 동선이 다감하고 안정적이다. 만화가들이 직접 쓰던 펜대와 펜촉을 구경할 수도 있다. 만화가가 생각하는, 만화에 대한 자기 문답이 영사기를 통해 벽에 나오기도 하는데 문장이 다소 흐려 잘 읽히지 않는 점은 아쉽다. 만화 주인공들을 불쑥불쑥 만날 수 있는 거리는 흥미롭다. 추억의 만화방과 4D 애니메이션 상영도 호응이 무척 좋다.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의 표정도 막막하거나 창백하지 않다. 출판만화와 정서적 유대감이 짙은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 만화와 현재 만화의 화법을 아이들은 어떤 심리로 접하고 있는지도 궁금한 일이다. 큼직한 화면에 손을 얹고 그림을 그려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골똘해 보인다. 포토샵 툴을 놀이하듯 즐기는 이 세대들은 앞으로 어떤 만화를 만들고 읽게 될까. 나들이 나온 가족과 연인 그리고 관람객 전반의 얼굴빛이 환한 것도 눈에 띈다. 넓은 규모에 시각자료가 굉장히 많아 움찔할 수도 있지만 쉴 곳이 곳곳에 놓여있고 천장이 높은 데다 공간연출이 입체적이고 재미난 까닭에 피로도가 덜하다. 대형 입체물로 제작된 만화책 보물섬 아래에서 양장본 댕기를 감상할 수도 있다. 전시장 한 곳에서는 1980년대 사회파 만화에 대한 영상물이 수시로 상영되고 있어 광장으로 나간 만화가들의 목소리와 작업물을 볼 수 있다. 바닥에 앉아도 상관없다면 잠시 머물러 보자. 계단과 화장실에도 재미있는 만화를 배치했다. 3층의 여러 공간 중에도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고우영관이다. 인쇄 전의 작업과정이 꼼꼼하고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잉크와 수정액과 풀자국이 남은 귀한 원화 자료와 작업도구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관람객이 많다. 영상과 사진을 통해서도 작가의 삶과 만화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만화가 가득한 서재_

한층 올라가면 체험형 전시실이 있다. 독촉전화가 오는 작업실, 만화가는 잠이 들어있고 관람객은 만화가의 머릿속을 따라 길을 걷는다. 라이트 박스 위에서 만화를 그려볼 수도 있다. 이곳 역시 유머러스한 대형 설치작업과 참여형 전시시설 및 카툰 갤러리 등의 공간을 두어 관람객과의 인접성을 높였다. 무대에 가까이 다가서면 라이파이 요새가 열리고 맹꽁이 서당의 하루가 시작된다. 바깥 옥상에는 널따란 휴식공간이 있어 잠시 숨을 돌릴 수도 있다. 분수와 나무 그리고 하늘이 한눈에 시원하게 들어온다. 잠깐 다리를 주무르고 안구운동을 했다면 지금 있는 4층에서 2층으로 이동하자. 놀라지 마시길. 국대 최대 규모의 만화 도서관이 있다. 활자 책 위주의 도서관과 반납기간이 너무 짧은 대여점과 시간당 이 가격이면 차라리 만화를 사보겠다며 만화방 앞을 서성였던 독자들은 고민하지 말고 부천으로 가자. 찾아도 물어도 없던 만화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책은 25만여 권으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박물관 3층과 4층 관람이 유료이며 만화영화 상영관을 제외한 1층과 2층 시설은 무료이니 조금 피곤하다면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2층에는 만화도서관 이외에도 아동열람실, 영상열람실, 자료보존실, 체험교육실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 8월 15일부터 19일까지는 한국만화박물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시민문화동산 일대에서 제15회 부천국제만화축제가 열리니 이 기간에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은 피서가 될 듯하다. 경제력과 의지가 있되 일이 바쁜 독자들은 퇴근길 만화책을 사서 귀가한 뒤 짜장면을 시키고 양반다리로 앉아 경건하고 복된 여름을 맞아보자.

 

부천, 만화의 도시_

부천은 서울과 인천을 아우르는 뛰어난 교통망과 대규모 물류 환경을 갖추고 있어 만화와 영상 사업의 큰 발판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공업도시로 성장한 부천은 수출망의 편의성과 노동력의 확보로 현재 국내 최대의 산업 직접화 시설을 지닌 곳이다. 특히 시 자체에서 만화부문에 주력을 쏟고 있어 2001년 최초로 한국만화박물관을 개관한데 이어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함께 부천을 만화도시로 각인시키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만화가 지망생과 만화가들 역시 이동과 작업이 용이한 연담도시 부천을 선호하는 편이다.

 

만화가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_

불규칙적인 생활과 잦은 불면 그리고 마감의 압박. 우리들 관념 속에서 만화가는 괴짜 게으름뱅이로 낙인찍혀 있는 듯하다. 일리는 있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전업만화가를 제하고 대부분의 만화가들은 만화 하나만을 그리고 있지 않다. 대체로 겸업을 하며 박봉에 시달린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극소수를 뺀 작업자 대개가 어려운 길, 어려울 길을 걷고 있다. 마감보다 무서운 것은 마감이 없다는 현실 아닐까. 빛을 발하지 못한 채로 취업광풍에 휩쓸리고 비경제활동인구 표본그래프에 수렴되며 친구와 가족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칸 속의 영웅과 달리 만화가 본인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가장 고마운 독자는 만화가들이 벌이는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애정 어린 시선과 건강한 비판으로 오래 지켜봐 주는 이들일 것이다. 만화가는 칸과 칸 사이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책을 읽고 나면 만화 속 인물들은 칸 밖으로 나와 당신의 친구가 되어준다. 이런 일이 사소한 기적 아닐까.

 

한국 만화박물관 이용안내

위치_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길주로1(상동 529-2)

전화번호_032-310-3090~1 팩스_032-664-3747

운영시간_10:00~18:00(17:00까지 입장)

휴무일_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 추석 연휴기간

입장료_일반권 5000원

주차_무료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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