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술차트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

접골 2023. 9. 6. 21:05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제목

전시를 위해 그림일기 몇 장을 그려내고 있을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저자의 양해를 구할 것도,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것도 없어 참 좋겠네. 그런데 말이다. 10대와 20대 사이, 지난날의 본인 일기를 들추어 보고 그걸 다시 한번 옮겨 적는 일이 이렇게 부박하고 남루할지는 몰랐다. 실패한 날, 조금 더 실패한 날, 완전히 실패한 날이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고 있는 나의 일기장. 불운이 감수분열하는 하루하루. 우습고 조악한 나날의 표현에는 자연스럽게 콜라주가 따라오게 되었다.

그것이 감정의 파편을 돕기도, 감정의 무거움을 경량화시키기도 했다. 작업 자체가 자가진단을 통한 미술치료랄까, 거울기법이랄까.

그리고 싶은 풍경은 매번 납작하고 물기 없는 형태로만 드러나지만, 애초에 잡으려고 했던 빛은 모두 흩어진 채 지난한 작업이 되어갈 때도 있지만. 단념하고, 인정하고, 조금 쑥스럽게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끼어들고 싶은가 보다. 세상으로, 인간으로, 그러니까 타인의 이해 속으로. 그 찰나의 빛에.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외치는 기분이 든다. "여기 있어, 난. 너는 언제 오는 거야?"

 

10점의 이미지와 텍스트_

미애와 루이

 

-내가 중국 여자와 다시 결혼하면 어떻게 할 거야?

-아니, 그럴 리 없어. 당신은 나를 너무 사랑하니까.

 미애는, 나에게, 너무, 아름답습니다, 당신이 그랬잖아.

-응, 너무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면은 당신이 더 많아.

 

개들과 아이들과 미애와 루이.

곧 베이징에 갈 거라고 했다.

내일이 오늘과 같은 건 참을 수 없어요,

내일은 다른 힘이 있어야 돼요.

어눌한 한국말로 루이가 말했다.

누워서 TV를 보다가

나와 참 다르구나, 혼잣말을 했다.

미애와 루이는 한여름의 바다,

빛이 가득 고인 물결 같아서

나는 아주 먼 데를 보듯 화면을 바라봤다.

 

 

긍정의 궁극

 

작은 전시에 갈 일이 있어 아까는 삼청동을 걸었다.

시간을 잘못 알았던 까닭에 전시회는 끝이 나 있었고

어둑해진 하늘 아래서 사람들은 작품들을 포장해 길로 나왔다.

잠깐동안 갤러리와 도로 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보이는 사람들과

엔틱한 거리를 지나오면서 알 수 없이 가슴팍이 또 좁아졌다.

자기표현이 명확한 대상들을 구경하다가 마음이 이번에도 개불처럼 흐물흐물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는 것이 나르시시즘의 다른 면일 수 있다고.

끊임없이 환경 안의 나를 조명하면서 자신을 주의주시하는 것이 무슨 이유이냐고.

다른 이에게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조용해줘 시끄러워,

말하지 않고도 이 말을 몇 번이나 뇌까렸었다.

말하자면 올해도 입에 모래가 한 움큼 틀어박힌 조개처럼 있었다.

인간의 정신이 성장하며 그것이 어느 정도의 지표로 나타난다면

내가 흘리고 다닌 치욕을, 치욕인지도 몰랐던 치욕을

누군가는 선명히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유치한 역설들을 바로 보았을 텐데.

 

이 짓거리. 한 해가 간다고 차도가 있을까.

그냥 나는 세상을 좋아한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은 관심이 많잖아. 일찍 죽고 싶다는 결의 따위 전혀 없잖아.

그러니 사랑을 하고 마음을 열고 누군가가 웃거나 울 때에

나도 웃거나 울고 사소한 것들에 열광을 하고

가슴이 벅차면 벅찬다고. 너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고.

좀, 말을, 하려고, 세계를, 안으려고, 끼어들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나 비 맞은 개처럼 달달 떨면서

소극적으로 대치하고 있을 순 없는 것이니까

차라리 소통을 하지 않으면서 소통하는 법,

불화하지 않으면서 불화하는 법,

너에게 다가서는 법 그리고 당신과 호흡하는 법,

나는 내가 더 많은 대화의 방법을 알아갔으면 좋겠다.

 

치졸하게 취약하게 변명을 해왔던 것도 나이고

앞으로의 그 모습 면면이 나일 것이지만

위악 없이 좀 더 핵에 가깝게 절실에 가깝게. 

 

 

스트레칭

 

아버지의 마지막 휴가일. 가족 5인이 차에 실려 집 밖을 구경했다.

영화를 볼까 밥을 먹을까 각자 무성의하게 의견을 쏟아내다가

바다로 길을 틀었지. 인천공항을 지나 7100원의 톨게이트비를 내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와아, 하고 쳐다보고

 

더럽고 따뜻한 바다 앞에 차를 세웠다.

수상한 가죽신 한 켤레, 남성용 줄무늬 팬티, 검은 비닐이

밀물과 썰물 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녔다.

 

아주 늙고 헐렁한 바다. 근육의 힘이 하나도 없었어.

 

부질없이 사진 몇 장을 찍고 부질없이 모래사장을 걷고

부질없이 노을을 오래 관찰하고 부질없이 추워, 추워 외치고

 

서로를 의식조차 하지 않는 기묘하고 다정한 마의 시간.

20년이 넘게 같이 있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이상한 시간.

 

선생님이 말했었지, 혼내지 않을 테니 손을 들라고,

선생님 혼자만 알고 있을 테니 솔직하게 손을 들라고.

나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는데 손이 올라갈 뻔했어.

내가 아니지만 나인 것만 같았지. 손이 들릴 뻔했어.

 

사람들 속에서 나는 그때 기분을 오래 자주 느껴.

순간의 강박이란 것쯤 알고 있어도 그런 건 치울 수가 없지.

그런 기분과 감정은 빨판이 엄청 세다고.

 

가족의 시간에서, 어젯밤 인천 앞바다에서,

더럽고 따뜻한 물결 속에서는 그런 시간이 지워진다.

 

일요일 낮에는 친구를 만났어.

크로키 시간이 다가와서 그만 헤어져야 했지만

마음으로는 강가, 담배, 더 긴 대화, 이런 단어가 떠다녔다.

그날 햇빛은 참 이상했지. 밑도 끝도 없는 구원 같았지.

강렬한 햇빛 속에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어.

 

내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사람이 더럽고 따뜻한 물결이라는 걸.

혼자 있을 때 들이닥치는 죄책감을 누군가 떼어주거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떼어낼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어쩌면 내가 누굴 조금 도울 수도 있다는 걸.

 

오독의 시간, 자승자박의 시간, 안온한 자학의 시간.

모래사장에 파묻어버릴 거야. 발로 꽉꽉 다져야지.

 

선생님. 그건 아주 나쁜 교육이었어요.

인간을 필요 없이 움츠러들게 하는 행위는 옳지가 않아요.

우리들은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었잖아요.

 

 

실격

 

입사 3일 만에 일을 그만두었다. 나조차 당황스럽다.

의지가 성향을 누를 수 있다고 믿었던 건 오산이었다.

타인 속에서 나는 물방울에 갇힌 개미처럼 무력하고 무능했다.

도리 없는 도태형 인간이라는 사실을 수차례 수차례 확인했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밀어 올리기 위해 거의 흰머리가 돋을 뻔했다.

용기를 내고 다짐을 하면서 회사 공터를 두 바퀴 돌았다.

걷는 동안 통신사에서 미납액을 납부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스티로폼을 타고 망망대해를 둥둥 떠다니는 내가 내 앞으로 떠밀려왔다.

그래서 잠시 아득했지만, 눈을 껌벅이며 자리에 멈춰 섰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결정을 내리고 과장, 상무, 주임, 사장 앞에 섰다.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는 나를 분리된 내가 쳐다보았다. 모두와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더 어색한 악수도 나눴다. 미안하고 무안했다.

한때 내 일부가 정말 가장 빠른 정자였을까.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헤엄을 쳤을까.

 

눈발이 점점이 떨어졌다. 버스에서 찬발을 녹이다 잠이 들었다. 정릉종점까지 다녀왔다. 검은 도로 위로 헤드라이트 빛이 수없이 어른거렸다. 중국집 대형창문으로 면을 뽑아내는 남자가 보였다. 면을 모았다 늘이고 다시 모았다 늘이는 그를 가만히 구경했다. 허기가 지고 고단해지면서 코트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매복해 있던 희망이 무섭게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가 청양고추를 듬뿍 썰어 넣은 두부찌개를 끓이고

가족들과 말없이 식사를 하고 보고 싶던 비디오를 빌렸다.

펜잘을 부수어 따뜻한 물과 함께 넘겼다.

 

어렵고 쓸쓸하고 작고 경이로운 얼굴.

해맑지만 결연하며 천진하지만 단단한 얼굴.

오랜 싸움에서 어떤 순리를 찾아낸 사람의 얼굴.

몇 가지 업무를 가르쳐주던 언니의 얼굴을 생각했다.

우리들의 붉은 유니폼과 안내데스크를 떠올렸다.

 

코너에 몰린 뒤에야 그림을 계속 그리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났다.

나의 형편없는 생활력과 사회성을 뚜렷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러설 수도 없이 두 눈으로 똑똑히, 허약한 나를 목도해 버렸다.

나가서 누군가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재능이 현저히 부족하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틀어박혀 꾸준히 오래 그려야 한다.

내가 나를 점점 좋아할 수 있게, 네가 나를 점점 좋아할 수 있게.

 

 

그래도 만화는 좋아

 

겨울에 일했던 만화방에서 잠깐 땜빵알바를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다녀갔다. 백여 명의 젊은 남성들이

토요일 신촌에서 혼자 쭈그려 전투적으로 만화만을 보고 있다.

하지만 밤거리 인파 속보다야 훨씬 나아 보이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는 아무도 외로워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입실표를 끊고 쥐포를 굽고 라면을 끓이고 테이블마다 탑처럼

쌓인 책을 세 겹 짜리 책장에 다시 넣고 식당에 주문연결을 하고

마포걸레로 오랫동안 청소를 하고 까치발로 형광등을 갈고  

발로 꾹꾹 누른 쓰레기 위에 쉼 없이 재떨이를 터는 내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는 무척 외로워 보이겠다는 생각은 든다.

 

어디서든 10시간 정도 일을 하다 보면 이런 물음이 생긴다.

내가 나가면 누군가 여기서 엇비슷한 노동을 할 텐데.

그 사람은 이 시간을 어떻게 버틸까.

왜 이런 가학적인 압박이 생겼을까.

 

결론은 만화를 안 좋아하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길목 좋고

넓은 만화가게에서는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기. 나는 정말

소원이 불 꺼진 만화방에서 밤새 만화 읽어보는 거였는데.

몇 권만 봐도 맥주를 조금만 마셔도 계속 웃을 수 있을 텐데.

아침에 눈떴을 때 만화책이 사방벽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모두 물 건너간 얘기. 노동은 리얼하고 리얼할 뿐.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산울림의 노래 제목

 

종점 찍기-무작위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보는 행위-를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몇 년간의 무료한 일요일과 담담한 오후를 나는 거의 버스 안에서 보낸 것 같다. 차에 실려 어디로 털털 흘러가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도 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참 아늑했지만. 길구경의 기쁨은 점점 사그라들고 인간관계는 말할 수 없이 척박해지고 좌심실엔 허망함만 켜켜이 쌓이게 되니 이제는 작별을 고할 시간. 사실은 사람과 나무와 길이 어느 순간부터 같은 색채로만 보여 겁이 난 것이겠지. 지난 일요일 김포공항-떠나보낼 사람도 맞을 사람도 없지만-에 다녀오면서 느꼈지.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나의 표정이 나를 곤란하고 괴롭게 한다는 걸. 둔감해지는 것과 둔감으로 고단해지는 것은-이런 말 자주 하는 것 같지만-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그동안 부실하고 허약한 정서를 키워줘서 고마워.

희미하게 탈색된 그 시간 모두가 정다워.

낡은 햇빛과 더러운 구름 그리고 매연 이따금 벌어졌던 싸움.

수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기사님들.

코끼리 사육장 같던 잿빛 차고지.

웃음이 크게 나오던 간판들. 스쳐 지나간 얼굴들.

미래가 없어 보이던 느낌. 길 위에서의 무력감.

남루하게 펄럭였던 나의 그림자. 헐렁한 강물.

포돗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낯설고 낯익은 집들.

불 켜진 창과 불 꺼진 창.

 

처음 종점까지 간 날은 길을 잃는 기분이 들었지만

한 번 두 번 나서보니 그렇지가 않았어.

어디에나 있는 터전과 공기와 햇볕과 사람들.

그게 좋아서 계속 나섰고 그게 피로해서 이만 접는다.

 

미래는 여전히 없어 보이지만.

미래 말고도 뭐든 없어 보이지만.

피식 웃고 의연해질 수 있다면 좋겠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라고

외치는 청춘물 속 소년소녀들처럼 강인하게 외쳐볼까.

석양을 향해 달리다 멈춘 뒤 울먹울먹 거리며 다짐이라도 해볼까.

내가 탄 이 행성은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어디서 내려야 돼?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대답을 좀 해줘. 너무 오래 말을 안 했잖아.

 

벤 위쇼

 

불안하고 다정한 얼굴.

 

첫인상에서의 판단이란 것은 얼마든지 변화하지만

누구든 오래 보면 정이 붙고 아름다움도 발견되지만

이런 인상은 부정할 수 없이 이끌리는 얼굴.

불안하고 다정한 벤위쇼의 얼굴.

 

나는 장동건에게 아무 매력도 못 느끼겠어.

누군가의 말처럼 그냥 단지 눈코입이 큰 거 같아.

모르겠어. 나로서는 1g의 감정도 없어. 싫다는 기호조차 안 서.

 

인생이 다소 피로해지는 이유는 이런 데서 오는 걸까.

사연 있어 보이는 얼굴, 극심하게 고단해 보이는 얼굴을 쫒기 때문에.

너의 불행에 가입하고 싶습니다, 나의 취향엔 이런 뿌리가 있나.

 

60년대도 아닌데 누군가를 살려내고 싶어 하는 이 어이없는 근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폐병쟁이 내 사내' 식의 감수성은 어떻게 해서 내게 흡착되어 있지.

 

단순한 공명심, 내면의 허영, 외부에서 문제를 찾는 습관, 내용 없는 책임감, 생활과 일상에 매몰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기이한 오만, 비건강에 대한 근거가 없는 애정. 안온한 1:1 관계에 대한 낯섦, 경계해도 피할 수 없던 연민. 그렇지. 참 한없이 게워낼 수 있겠구나.

 

사랑과 평화 쪽으로 머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내 뒷걸음질 친 것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정말로 쉬고 싶어.

얼굴의 반쪽이 웃고 다른 반쪽이 무표정한 건 싫어.

인간의 다정한 품에서 올곧이 마음을 누이고 싶어.

고마워,라고 손으로 눈으로 말하고 싶어.

 

울고 있어도 슬퍼서 우는 게 아닌 줄을 그때의 너는 알 수 있겠지.

그러니 놀라지 않고 그저 등을 툭툭 두드려주겠지.

 

우선 내가 나를 일으켜줘야 해.

관성이 되려 하는 감정의 탈진상태를 막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시 눈이 멀고 다시 너를 찌를 거야.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제목

 

개강인지도 모르고 핸드폰도 꺼둔 채 바닷물이나 구경을 했다.

헤드폰을 끼고 다니는 일이 타지에서는 참으로 편리했다.

 

청설모가 죽은 쥔 지 죽인 쥔 지를 물고 돌아가는 방파제.

등대 밑에서 동서남북으로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춤을 추었던 밤.

번개를 피해 온 군사경계지역에서 낯선 군인과 말없이 피운 담배.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우주와 우주만큼 먼 사람들에 대한 생각.

어쩔 수 없는 것에만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는 나에 대한 확인.

모든 기억은 불구라지만 그 기억조차 기어이 피떡을 만들고야 마는 나의 성정.

 

이런 우울 따위 라디오 체조 15분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마음속에 지옥을 세워야만 웃을 수 있고.

 

섬에서 함께 한 것들_

백현진 1집, 언니네 이발관 5집, 김행숙 이별의 능력,

디스플러스 두 갑, HITE 댓 자 4병.

 

우스운 폭발

 

버스 유리창을 박살내고 몸이 튕겨져 나갈까 봐 간혹 겁이 날 때가 있는데 요새는 부쩍 자주 그렇다. 난폭한 운전습관은 더 난폭한 운전습관을 부르기 마련이므로 하루하루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일이 점차 녹록지 않다. 급정거 때 잠깐 발을 헛디뎠다가는 손잡이 봉에 이가 다 나갈 것도 같다. '이렇게 죽음을 당하기는 싫다. 갑자기 유리창을 뚫고 미친 속도로 튀어나가기는 정말 싫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죽기 싫다' 결의에 찬 눈으로 이런 독백을 하며 기사를 바라보지만 기사는 본인의 인간사에 지쳐 환멸 어린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는 사마귀와 불곰처럼 대화를 할 수가 없다. 버스 속에서 사고가 나기 직전과 사고가 일어날뻔한 순간과 사고를 다행히 비껴간 찰나를 무력하게 겪고 겪는다. 앞유리가 깨지는 미약(할리 없지만 결과적으로 미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한 접촉사고가 요사이 벌써 3번째다. 이기적 유전자의 지령일 수도 있지만 아직 나는 흔적 없이 돌연사하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알 수없고

죽어가는 순간 아차, 싶을 뿐 돌이킬 수가 없으니

 

역시 계속 무섭다.

 

사람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아직 감을 못 잡 잡겠다. 이렇게 굉장한 사실이 어이없을 만큼 막연하다. 오래오래 살아,라는 안부나 인사는 어쩌면 어처구니없을 만큼 처연한 말 아닐까.

 

생명의 유한함에 예민해져 갈수록 긍정론자가 되기 쉬운 걸까.

시시콜콜한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생길 수 있는 걸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과도한 주관적 의미부여를 경계한 가사가 아닐까. 너무 아끼면 부풀려지니까 그럴수록 본질과 멀어지니까. 자식아 적당히 해라, 이 말인가. 살아가는 일에 대한 회의와 애정, 애정과 회의가 뒤범벅이다,라는 느낌도 어쩌면 그냥 타성이며 시늉일까.

 

오래전 누군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뜨거운 무관심, 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지구에서의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들끓고 들끓어도 나아가기가 힘들다. 그저 해결날 리 만무한 질문뿐.

 

빵상. 깨랑까랑.

인간들아. 무엇을 알고 싶느냐.

 

우주신님. 근데 왜 자꾸 하나도 못 맞춰요.

 

 

이 뭐

 

친구가 나의 방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있다.

이사를 한 후에 나 외의 모든 식구들은 친한 사람들을

몇 차례나 데려왔다. 너무 오래 아무도 부르지 못하는 내가

머뭇머뭇 미끈거리는 민달팽이처럼 생각된 적도 있다.

푸세식 공동화장실을 떠올리면 혼자 집에 가게 됐다.

이제는 상황이 좀 나아졌는데 훨씬 쾌적해졌는데

역시 쉽지가 않다. 몸에서 이미 인격이 생긴 남루함이

자연스러운 사교와 부드러운 관계 맺기를 어색해한다.

 

친구가 방 한 면의 시디벽을 보면서 놀라워했다.

화장품도 옷도 안 사고 머리도 안 하고 사람도 안 만나고

저임금 알바로 참 조밀조밀하게도 모아 온 시디들인데

그 편을 가만히 보면 웃기기도 하다. 뭔가 참 앙상해서.

애정을 갖고 모아 왔지만 어느 순간엔 아집 같아 보이기도 해서.

언제나 나를 위해서만 돌아가는 빛나고 둥근 음반.

자유와 속박을 동시에 주는 완벽한 원.

타인에게 덜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외부로 더 끼어들 수 있었을까.

눈을 감고 플레이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면.

골방에서 천장만 올려다보지 않았다면.

 

인류애에 대한 관념과 이해는 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뭉뚱그려진 채로 거리가 생긴 사람들의 풍경을 참아내지

각각의 인간의 내부는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멀리 있는 사람들.

오랫동안 보지 못해 아득해진 사람들.

냉소도 애정도 보낼 수 없는 사람.

숨어있는 사람과 말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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