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트지 위에 목탄. 목탄은 좋은데 목탄 가루는 번거롭고. 아직까진 픽사티브로 눌러주는 방법밖에.
성격장애에 관한 간단한 정보와 점검지문이 함께 있는 일러스트레이션.
테스트 지문은 장근영의 너, 싸이코지? 에서 발췌
목탄 인간으로 드러내는 단백질 인간
몇 주째 그려가던 그림들을 모두 화판에 넣어 두었다. 기획이 바뀌고 엎어지고, 쓸 수 없는 그림이 한 점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일없이 장난처럼 인물을 그려 대기 시작했다. 텍스트도 청사진도 없이 무작정 나타난 얼굴들. 토르소처럼 머리와 사지가 없는 그림만을 가만히 만들었다. 그림에 맞는 글을 찾는 역순의 작업방식 때문에 도서관에 자주 들렸다. 간혹,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입을 억지로 벌리게 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째서 또 인간일까. 왜 인간의 표정으로 갔나. 자문을 해보면 별 효용 없는 답만 돌아왔다. 너는 미묘하고 알량한 인간이니까. 너는 그게 어쩔 수 없이 눈에 밟히니까.
목탄과 표정, 단 두 가지가 이 그림들의 제재다. 하지만 이 둘로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은 우주적이라고 느낀다. 매일 심장이 나뉘고 나뉘는 기분이 들지만, 그 편협이 이제는 나의 한 축이기도 하지만. 작업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익명의 이해자들을 그려나갈 때만은 내가 팽창되길 바란다. 그래서 그림 속의 당신을 발견하는 당신을 내가 발견하는 시간이 찾아와 주면 참 좋겠다.
체크해 봐, 몇 개 정도가 너의 이야기인지.
서너 개가량은 누구에게나 있는 항목이야.
결과는 비밀로 부쳐둘게.
두려워하지 말고 렛츠 스타트!
한밤중의 하늘에 물어보아도 별들만 반짝일 뿐
마음에서 흘러나온 물이 검은 호수로 흘러갈 뿐
다시 한번 천사는 나를 돌아볼까
내 마음속에서 물놀이를 할까
겨울바람에 눈물이 흔들리고 어둠 속으로 인도하네
얼음같이 차가운 눈동자로 나는 점점 커가고
누구도 다가서지 않는 악취를 풍기는 보석
-영화 ‘아무도 모른다’ OST, 보석.
머리부터 발끝까지 썩었구나
:수동공격성
1.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 당당히 거부하기보다는 실제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느리고 불완전하게 한다.
2. 남들이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지 않아서 불만이다.
3. 평소에 뚱하고 비꼬아 말하는 적이 많다.
4.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 구리고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나보다 더 행운이 있는 것 같은 사람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화가 난다.
6. 솔직히 나는 남들보다 훨씬 운이 없고 불행하다.
7. 상대방의 속을 긁어놓고는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종종 있다.
우주먼지
:회피성
1. 비판이나 거절, 인정받지 못하는 것 등 때문에 의미 있는 대인 접촉과 관련된 직업활동을 회피한다.
2.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 없이는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을 피한다.
3. 수치를 느끼거나 놀림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친근한 대인관계 이내로 자신을 제한한다.
4. 사회적 상황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거절당하는 것에 대해 집착한다.
5. 부적절감으로 인해 새로운 대인관계 상황에서 제한된다.
6. 자신을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사람, 개인적으로 매력이 없는 사람, 다른 사람에 비해 열등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7.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까 봐 어떤 새로운 일에 관여하는 것, 또는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드물게 마지못해서 한다.
무가당 청춘
:우울성
1. 평상시의 기본 감정이 평온함이 아니라 낙담, 침울함, 즐거움이 없음, 기쁨이 없음, 불행함이다.
2. 자기가 부적절하고 무가치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존심 역시 약하다.
3. 자신에 대해 비판적이고 자기 탓을 하며 자신을 과소평가한다.
4. 곰곰이 생각에 빠지며 걱정을 잘한다.
5. 타인에 대해 부정적, 비판적으로 판단한다.
6. 비관적이다.
7. 하루에도 여러 번 죄책감을 느끼거나 후회를 한다.
Don't pull focus!
:분열형
1. 남들이 나에게 아주 큰 영향을 받는다고 믿는다.
2. 이상한 믿음이나 마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한다
3. 신체적 착각을 포함한 이상한 지각 경험을 한다.
4. 이상한 생각을 하고 이상한 말, 이를테면 모호하고 우회적, 은유적, 과장적으로 수식된 또는 상용적인 말을 한다.
5. 주변 사람들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6. 주변 사람들을 의심해서 감정표현을 억누르고 부적절하게 표현한다.
7. 괴상하게 차려입고 괴상한 행동을 한다.
8. 부모나 형제 외에는 친한 친구나 동료가 없다.
9. 다른 사람과 친해져도 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못한다.
좋아?
:분열성
1. 나는 가족을 포함해서 어떤 사람 하고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친하고 싶지도 않다.
2. 가능하다면 혼자서 노는 쪽을 택한다.
3. 성적(sexual)인 관심이 거의 없다.
4. 즐거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5. 가족 이외에는 친한 친구가 없다.
6.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에 무덤덤하다.
7. 감정이나 느낌이 아주 단순하다.
세미프로
:자기애성
1. 나는 내가 한 일에 비해서 턱없이 적게 인정받아왔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아주는 사람이 정말 드물다.
2. 나는 반드시 엄청나게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3. 평범한 사람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고민을 겪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수준 높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4. 아마 내 능력과 내가 해온 일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안다면, 사람들은 정말 내 발 밑에 엎드려야 할 것이다.
5. 나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끼지만,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6. 내가 하는 일은 사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목적을 공유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금씩 희생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7. 사람들이 왜 그렇게 칭얼대고 불만을 토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감사해야 한다.
8. 한 일도 없으면서 나보다 훨씬 더 인정받는 인간들을 볼 때면 정말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게다가 지금도 나를 시기하고 해코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래서 성공하기가 두렵다.
9.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지나치다는 말을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지나치게 공격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러브란 것도 별 수가 없구나
:편집성
1. 다른 사람들이 나를 관찰하고 해를 끼치고 기만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데 남들은 이런 이야기를 잘 믿어주지 않는다.
2. 친구들이나 동료들도 결국에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가끔 깨닫게 된다.
3.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게 돌고 돌아 언젠가 나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4. 사람들은 가끔 내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곤 한다.
그래서 화를 내면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화를 낸다고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때가 있다.
5. 나는 한번 받은 모욕이나 상처는 결코 잊지 않는다.
6. 사람들이 왜 자꾸 내 성격이나 내 평판을 공격하고 흠집을 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공격을 받을 때마다 즉각 강력하게 반격한다.
7. 내 애인 또는 내 배우자도 결국 사람이고,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슬프게도 사실이다.
어쩔
:반사회적
1. 자꾸 법을 어겨서 체포되고 유치장에 갇힌다.
2. 자신의 이익이나 쾌락을 위해 아주 쉽게 거짓말을 한다.
3.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고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4. 공격적이거나 폭력적이고, 걸핏하면 싸움에 말려든다.
5. 자신이나 타인의 안전에 대해 부주의하게 무시한다.
6. 한 직장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지출을 하는 바람에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지 못한다.
7.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학대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알아요
:히스테리성
1.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목을 받거나 관심을 끌면 왠지 불편하다.
2. 사람들은 주로 내 몸매나 머리카락 같은 데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3. 나는 종종 감정이 아주 빠르게 변하는데, 그 상태를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4. 주변 사람들에게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거나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사실 어느 정도는 그런 반응을 즐긴다.
5.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내 생각을 표현할 때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좀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6. 나는 내가 느끼는 이 놀라운 기분을 남들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이게 어떤 느낌인지 보여주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아듣는지는 모르겠다.
7. 누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하거나 지적하면 정말 그게 진짜 나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예민하다.
8. 누구든 몇 번 만나보면 상대가 얼마나 나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너무 빨리 친해지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워낙 그런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익숙해졌다.
새끼 뭐래냐
:경계선적
1. 내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것 같아 늘 걱정이 된다. 그래서 자꾸 그것을 피하기 위해 쓸데없는 노력을 하게 된다.
2. 다른 사람들은 내 마음속에서 아주 좋은 사람도 되었다가 아주 한심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3. 어떨 때는 내가 아주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또 어떨 때는 정말 대책 없이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다.
4. 과소비를 하거나, 약을 지나치게 먹거나, 좀도둑질을 하거나, 난폭운전을 하거나, 과식을 하는 등의 행동을 해본 적이 여러 번 있다.
5. 자살을 시도하거나 최소한 자해를 한 적이 있고, 친구들에게 자살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6.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가끔 몇 시간씩 갑자기 엄청나게 화가 나고 모든 사람이 미워지는 경우가 있다.
7. 나는 늘 삶이 공허하다고 느낀다.
8. 자주 울화통을 터뜨리거나, 늘 화를 내거나, 자주 몸싸움을 한다.
9. 가끔 내게 일어났던 큰 사건에 대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인생은 고행
:강박성
1. 일의 세부규칙, 목록 정하기, 순서 또는 스케줄에 집착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을 못한다.
2. 지나치게 완벽함을 추구하느라 일을 완성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즉, 자신의 완벽한 기준에 만족하지 못해 아예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3. 자기 직업이나 어떤 작업을 위해 여가활동이나 사회관계를 모두 포기한다(단, 경제적인 이유로 꼭 그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경우는 제외한다).
4.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소심하고, 도덕윤리나 가치관에 관하여 융통성이 없다(하지만 문화적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 경우는 제외한다).
5. 정서적인 의미(자기의 특별한 경험이나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든지 하는)도 없고 실용적으로, 경제적으로도 의미가 없는 낡고 가치 없는 물건들도 버리지 못한다.
6. 자기가 일하는 방식을 정확히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을 위임하거나 같이 일하지 않으려 한다.
7. 자신이나 남을 위해 돈을 쓰는데 매우 인색하다(돈을 미래의 재난에 대해 대비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8. 전반적으로 경직되어 있고 완강하다.
지박령
:의존성
1. 혼자서는 어디를 가야 하고, 뭘 먹어야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등 매일매일 하는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한다.
2. 학생이라면 공부를 하는 일, 직장인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처럼 삶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을 남이 책임지게 한다.
3. 상대의 지지와 칭찬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그 사람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표현하지 못한다(단, 반대를 하면 실제로 보복을 당하기 때문에 이견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는 제외).
4. 스스로 일을 하거나 계획을 실행하기가 힘들다(동기나 에너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자기의 판단력이나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5. 그렇기 때문에 불쾌한 일이라도 그것을 함으로써 누군가의 돌봄과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면 기꺼이 자원한다.
6.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심한 공포 때문에 불편함과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다.
7. 연애나 친밀한 관계가 끝나면 시급히 새로운 관계를 찾는데, 그것은 외로움이나 사교성을 위해서나 아니라 자기를 돌봐 주고 지지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8. 혼자 남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며, 혼자 남지 않기 위해서 지나치게 노력한다.
‘단일한 인격’이라는 신화
‘인격(personality)'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해 두는 게 좋겠다. 우리는 평소에 누군가 인격이라는 단어를 쓸 때 구태여 의미를 묻지 않는다. 너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학에는 인격에 대한 공인된 정의가 없다. 사전도 별반 도움이 못 된다. 정의는 여러 가지로 적혀 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한 사람의 정신적, 행동적 특징의 총합으로서 그것을 통해 남들이 그 사람을 독특하다고 인지하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독특한 특징’이라는 정의도 있다. 둘은 꽤나 시각이 다른 정의들이다. 여러분이 가진 사전에는 또 다른 표현이 있을지 모른다.
한 사람이 지닌 특징들의 ‘총합’으로서 인격을 정의하면 당연히 하나 이상의 인격을 가질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다. 하지만 그러면 인격이란 단어 자체는 무의미하다. ‘사람’이라는 용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격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네케르 정육면체 같은 상충하는 생활 방식을 한 번도 고민하지 않고 평생을 산다. 그들이 마주치는 상황에는 반응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 대응하는 방식, 존재하는 방식이 한 가지밖에 없다. 어쩌면 선택지들이 존재하는 상황인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존재’들을 품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느낌 그대로 단일하고 ‘온전한’ 인격이다.
반면 우리들 대부분은 삶이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상황과 끊임없이 마주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갈수록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는 형편이다. 삶이 단순해지는 일은 거의 없고 늘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봤다가 저런 식으로 보고, 이런 존재였다가 저런 존재가 된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자아의 가족을 만들어 간다. 피에르 자네의 표현으로는 ‘존재들’이다. 어느 순간에 나의 자아가 ‘되는’ 식구들이다.
정의상 인격들을 서로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격은 완전히 갈라진 개인들이 아니라 몸이 붙은 샴쌍둥이에 가깝다. 동일한 감각 자극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그들 사이의 경계는 흐릿할 수밖에 없다. 인격들은 한 몸에 공존하기 때문에 무척 많은 일들을 공유한다. 따라서 한 인격이 활동하고 다른 인격이 끝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기는 힘들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존재가 대체로 별 변화 없는 하나의 개체라고 강하게, 지속적으로 느낀다. 지금의 ‘나’는 내일의 ‘나’와 같으리라 느낀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본 바, 그런 확신은 잘못된 것이다. 인격의 풍경은 자주 변하고 때로 흐릿해진다. 우리가 좋아하는 내적 안정성, 일관성,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사실 신화에 불과할 수 있다.
-다중인격의 심리학, 리타 카터.
우리가 왜 행복해야 해?
18세기 프랑스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선구자이자 후원자인 미라보는, 젊은 시절(1738) 그의 친구이자 모럴리스트인 보르나르그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는 이 편지에서 보브나르그가 그날그날 삶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고 있을 뿐 자신을 위한 행복의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다고 나무란다. “글쎄 이 친구야, 그대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공부하는 데에만 매달리고 있군 그래. 이제 그대의 사상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네. 하지만 단 한순간도 그대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인 행복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방향으로 고정된 플랜을 짜는 일을 생각해 보지 않은 듯하네.” 그런 뒤 미라보는 그 회의적인 친구에게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들을 설명한다. 이 원칙들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고, 화보다는 즐거움을 찾으며, 자신의 성향을 세련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젊은이의 열정을 비웃을 수도 있다. 인간을 재창조하고 구제도의 악취를 몰아내고자 했던 시대가 낳은 미라보, 바로 그가 자신의 축복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들이 영혼의 구제를 염려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오늘날의 미라보 같은 사람들을 상상해 보자. 새로운 시대를 개막시키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나는 20세기의 잔해를 청산하고자 열망하는 자들, 온갖 환경에 갖가지 견해를 지닌 저 젊은 남녀들을 말이다. 그들은 충만한 삶의 약속이 그들 각자에게 주어졌다고 확신한 채,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삶을 구축하고자 갈망하면서 실존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행복하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어떤 가치나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 활짝 핀 개인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하라! 이 말의 듣기 좋은 어투만을 볼 때, 이보다 역설적이고 더 끔찍한 명령이 있을까? 그것은 대상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피하기가 어려운 명령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가 행복의 기준을 정한단 말인가? 왜 행복해야 하고, 왜 이러한 권고는 명령의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아”라고 가엾게 고백하는 이들에게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요컨대 행복이라는 특권은, 곧바로 우리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짐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역경이나 성공에 대해 홀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들은, 그토록 기다린 행복이 그것을 추구해 감에 따라 도리어 그들로부터 달아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렇듯이 그들 역시 직업, 사랑, 도덕, 가정에 있어서 동시에 성공을 가져다주고, 어떤 보답처럼 각각의 개별적인 것을 넘어서는 감탄할 만한 종합과 완벽한 만족을 꿈꿀 것이다. 마치 현대성이 약속한 자신의 해방이, 과정을 장식하는 왕관인 행복으로 마감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종합은 그들이 그것을 개발해 감에 따라 하나씩 해체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환희의 약속을 반가운 소식이 아니라 그들이 한없이 값아야 하는, 얼굴 없는 신에 대한 빚처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예고된 수많은 경이로움 들은 추구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답답함을 더욱 무겁게 만들면서, 다만 아주 조금씩 무질서하게만 그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결국 그들은 기존의 계산표에 부응하지 못하고 규칙을 위반하고 있음을 후회할 것이다.
미라보는 여전히 꿈꿀 수 있었고, 공상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3세기가 지난 지금, 계몽 시대의 한 귀족이 지녔던 약간은 열광적인 그 이상은 회개로 변모되었다. 이제 우리는 지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권리를 다 가지고 있다.
행복이란 관념보다 더 막연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러나 바야흐로 행복은 창녀처럼 더럽혀지고 불순물이 많이 섞였으며, 또한 심하게 오염되었기에 언어로부터 추방하고 싶을 정도로 낡은 낱말이 되어 버렸다. 고대 이래로 존재하는 것은, 단지 행복의 연속적이고 모순적인 의미들의 역사일 뿐이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살던 시대에 행복에 관한 2백89개의 다양한 견해들을 열거하였으며, 18세기에는 약 50개의 행복론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계속해서 옛 시대들이나 다른 문화들에 대해 우리 문화에만 속하는 착상과 강박관념을 투영하고 있다.
행복이 하나의 수수께끼이고, 항구적인 논쟁의 원천이며, 모든 형태와 결합될 수 있지만 어떤 형태도 고갈시킬 수 없는 물이라는 것은 그것이 지닌 개념의 성격에 속한다. 행동의 행복이 있듯이 관조의 행복이 있고, 영혼의 행복이 있듯이 감각의 행복이 있으며, 풍요의 행복이 있듯이 궁핍의 행복이 있고, 미덕의 행복이 있듯이 범죄의 행복도 있는 것이다. 디드로는 “행복의 이론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 이론들을 만드는 사람들의 역사만을 이야기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세 가지 역설을 만난다. 우선 그것은 매구 막연한 대상을 향하고 있어 그 불명확성으로 인해 위협적이 된다. 다음으로 그것은 실현되자마자 권태나 반감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상적 행복은 좌절과 싫증이라는 이중적 함정을 피하는, 언제나 만족되고 언제나 다시 태어나는 행복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고통을 피한다. 고통이 나타나자마자 그 고통 앞에서 무방비 상태가 될 정도로 말이다.
첫 번째의 경우, 행복의 추상적 성격 자체가 행복의 매력과 동시에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미리 만들어진 낙원을 경계할 뿐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인지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행복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미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순응주의와 선망이란 두 태도와 동시에 연결된 그런 상태에 대한 열광이 나온다. 이 두 태도는 민주주의 문화가 공유하는 두 가지 병이다. 그것들은 대다수의 쾌락에 동참하는 것이고, 행운의 찬스를 잡은 선택받은 자들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 세속적 형태로서의 행복에 대한 염려는 유럽에서 평범함에 도래와 시대를 같이하고 있다. 평범함이라는 이 새로운 시간적 체제는 근대의 여명기에 자리 잡는데, 신이 물러난 후 범속한 단조로움으로 떨어진 세속적 삶의 승리를 보게 된다. 평범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 질서의 승리를 말하며 범용, 밋밋함, 저속함을 그 내용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목표는 고통을 제거하려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고통을 제도의 중심에 다시 가져다 놓는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인간은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또한 고통을 받는다. 완벽한 건강을 추구함으로써 아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즉 사회 전체가 쾌락주의에 빠져있고, 모든 것이 노여움이 되고 고통이 되고 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불행은 단지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나아가 행복의 실패인 것이다.
따라서 행복의 의무를 통해 내가 그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쾌락과 불쾌의 각도에서 평가하도록 밀어붙이는 이 시대에 고유한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그것은 또한 행복감에의 소환, 응하지 않는 자들을 부끄럽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그러한 소환을 말한다. 그 속에는 이중의 가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못할 경우 애통해하고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라는 것이다. 각자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고, 자신의 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가장 아름다운 관념의 타락이 아닐 수 없다. 계몽 시대의 해방적인 슬로건이었던 행복에의 권리가 어떻게 도그마로 변모되고, 집단적인 신조로 변모될 수 있었는가?
최고선의 의미들은 매우 다양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부, 신체, 안락, 유복 같은 몇몇 집단적인 이상들에 고정시킨다. 이러한 것들은 미끼에 걸리기 위해 날아드는 새처럼 사람들이 걸려들게 되어 있는 그만큼의 부적들 같은 것이다. 수단은 목적의 지위를 차지하고, 추구된 황홀이 약속되지 않자마자 불충분함을 드러낸다. 따라서 잔인한 착각이지만, 흔히 우리는 행복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할 수단들 자체에 의해서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과 관련해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오류들이 나온다. 사람들은 행복을 당연히 받아햐 할 몫처럼 요구해야 하며, 그것을 교과목처럼 배워야 하고, 집을 짓듯이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는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고,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다른 이들은 확실한 행복의 원천을 지니고 있고, 그들처럼 모든 것을 동일한 후광 속에 잠기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모방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줄기차게 되풀이된 상투적인 생각과는 반대로-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우리 모두가 역사적으로 연대가 추정되는 가치인 행복을 추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가치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자유, 정의, 사랑, 우정 같은 다른 가치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공허한 일반성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모든 인간들이 태곳적부터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단 말인가? 행복에 반대 입장을 취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허약한 감정이 확실한 집단적 마취제로 변모한 것에 반대 입장을 취하자는 것이다. 각자가 화학적, 정신적, 심리적, 정보적, 종교적 형태로 빠져들게 되어 있는 그 집단적 마취제 말이다. 극도로 고심하여 구상된 지혜들과 학문들은 민족들이나 개인들의 축복을 보장해 주는 데 스스로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판이다. 축복은 그것이 우리를 스쳐갈 때마다, 우리에게 계산이나 특수한 이끎이 아니라 은총과 호의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아마 우리는 절대적인 지복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을 버렸기 때문에 세계가 베푸는 친절, 기회, 쾌락, 행운을 그만큼 더 잘 맛본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젊은 미라보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행복해지기만을 원하기에는 인생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행복의 의무에 관한 에세이 ‘영원한 황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