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골원일지

조잡한 유기체

접골 2023. 9. 9. 23:39

1. 몇 번의 이사를 통해 내가 얼마나 무서운 집적형 인간인지를 깨닫고 있다.
대학시절의 서류들만 몇 박스인지 모르겠다. 다시 안 볼 책들도 참 많이 샀다.
목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쓰고 견고한 짐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생각난 듯
당근주스를 한 잔 마시고 연속극을 보면서 방의 짐이 증발되어 있길 빌었지만
-_- 문을 열면 각종 파일과 비닐과 박스가 계속해서 객관적으로 쌓여있다.
라디오를 켜 놓고 몇 명의 디제이들을 만나면서 '우선 눈에 안 보이게 하는 데'에
반나절을 소비했다. 아버지의 일기장 몇 권을 찾은 것이 짐정리의 주요 수확.

2. 이사 전에 마라톤 신청을 해둔 게 화근이 되어 짐을 방치해 둔 채 뛰러 나갔다.
두 시간 정도만 달리는 거야. 껌이지. 씁씁 후후!! 하지만 실제체력은 시궁창.
걷고 계신 할머니에게도 뒤쳐지면서 경보와 달리기를 섞어 가까스로 완주.
지점마다 낯선 학생들에게 파이팅, 힘내요! 같은 무지막지한 응원세례를 받았다.
받자마자 도금이 벗겨지고 있는 메달과 간식꾸러미를 받고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평소에 잘 안 먹던 바나나를 반토막이나 씹어 삼켰다.
오전 중에 일정이 완료되고 날씨는 좋고 내친김에 하늘공원 산보까지
하고 와서 이튿날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표정에 슬픔이 치밀었다.

3. 이사 온 지역은 서울과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 고양시일 뿐인데도
버스에서 내리면 어디선가 소의 생똥냄새가 풍겨온다. 아침엔 닭 떼가
울고 새벽엔 목줄 없는 개들끼리 서열다툼을 벌인다. 마을 입구 도로엔
화물차들이 제한속도 따위 가볍게 무시한 채 굉음을 내며 달린다.
신호등불은 너무 빨리 바뀌고 횡단보도엔 사고표시가 현장감 있게 남아있다.
가까운 슈퍼는 20분 거리. 너무 많은 주유소와 대형 아웃도어 매장들.
음식점이라곤 평범하지 않은 100평 이상의 한우, 게장, 추어탕집들.
김밥천국 같은 체인점은 전무하고 당구장 옆엔 스타벅스가 아닌 정말 '별다방'이 있다.
헬스장 대신 복지회관의 체력단련소가 있는데 아직 드나드는 사람 한 명을 못 봤다.
아이스크림 공장에선 무려 직거래를(아이스박스에 내려받나)할 수 있다고 한다.
맥주를 팔 것 같은 단 한 곳의 생닭집이 있었는데 밤 9시면 문을 닫는다고 했다.
실제로 해가 지면 온 동네가 칠흑이다. 친해진 생물은 동네의 떠돌이 삽살개.
아침 일찍부터 더러운 개천 근처에서 풀을 뜯어먹다가 금방 정을 줬다.
들어가라고 인사를 했는데도 빨간불일 때 머뭇거리다 내 쪽으로 달려와서
가슴이 터질 뻔했다. 쫄랑쫄랑 따라오다 도사견냄새를 맡으면 사라지고 없다.
어귀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동네. 비닐이 반짝반짝, 매일이 가을운동회.
이제 이 터에서 몸을 끄-을-고 동선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남은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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