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에는 광화문에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유학을 가 있는 어린 동생을 위해 이런저런 도서를 구해야 했거든요. 해가 내리쬐는 한낮에 잿빛 스웨터를 걸친 저를 보고 어머니께선 너는 예의가 없으며 세상을 잘못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철야예배라도 나가 전심전력 기도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경기로 이사를 간 뒤부터 날씨를 체득하는 일이 몹시 어려워졌습니다. 오전만 해도 옥상에 서서 강풍에 시달렸습니다. 바깥이 여전히 추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대로 한복판에 있는 분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검은 콩국수와 비빔냉면엔 누군가 사카린을 들이부은 것 같았습니다. 우울함을 유발하는 단맛을 없애기 위해 냉면에 식초를 쏟아봤지만 미지근한 면발 사이로 날치알 같은 기포가 조금 차올랐을 뿐 맛은 더욱더 참담해져 갔습니다. 어머니는 계속 통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휴대폰에 묻은 파운데이션 자국이 덥고 어지럽게 느껴졌습니다. 벨이 자꾸 울리는 통에 저는 홀로 면발을 뒤적이면서 어머니의 들뜬 화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눈가에 날카로운 눈곱이 매달려있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작업실에서는 붉은 기린 그림을 좀 더 고쳐나갔습니다. 그림이 침착하지 못하다는 판단 아래 명암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것은 곧 60, 70년대의 극장 간판처럼 변모해 버렸습니다. 납작했고 볼품이 없었지요. 애초에 키치를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지는 유쾌하지도 않았습니다. 기린은 자의식 과잉에 처한 것처럼 보였고 지나치게 부담스러웠으며 심지어는 염소나 노새처럼 보였습니다.
저에게는 시도와 가능성을 환멸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용함, 언어의 가소로움, 관계의 너절함, 미래의 허망함 따위를 너무도 잘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구를 엄격하게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 해 밀어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깨끗했고 스스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공을 들여 완벽히 절연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 같은 견고함에 다소 지질려버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완고한 비관이 어쩐지 비대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개 유형의 인간으로 누군가 조금이라도 인기척을 내면 꼬리를 흔들고 눈을 뒤룩거렸으니까요. 태생적으로 우아하지가 못한 저는 무엇을 훼손시켜 그 냄새를 맡지 않고는 못 배기고 마는 성미의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이가 급속도로 멀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몇 년간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았고 제가 길에서 아는 척을 해도 지나쳐갔습니다. 후일 짧은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가까스로 비어져 나온 예의 그 자체의 언어였습니다. 온도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침묵을 깨자 우리는 오히려 멀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그가 세상에 그만 실망하기를 바라고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와 달리 입을 놀리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적당히 발을 끼워 넣은 채 적절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세상이 절연씩이나 할 만한 곳인가, 도무지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고 태연히 생각했습니다. 저에게는 조금의 성의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제게 말했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잘 미끄러지는 것입니까. 제대로 된 대답을 피하고 사람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을 저는 여유 있는 위트와 수줍음 탓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무지는 무서울 정도로 밝고 건강하였습니다.
버스에 매일 오르면서도 노약자석이 너무 많은 것에 매번 놀라곤 합니다. 노약자석은 어느새 버스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젊은이라곤 보이질 않습니다. 사실 젊은이는 원래부터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치원생의 얼굴도 이미 피로와 권태와 영악에 찌들어있지 않습니까. 고백하자면 오늘 낮에 아이들을 제 옆에 세운 채 두 정거장을 갔습니다.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오누이는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과장되게 흔들렸습니다. 창밖을 보면서도 아이들의 어머니가 저의 정수리를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허벅지 근육이 얼어붙어 저는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저의 얼굴은 점점 비정미를 풍겼습니다. 일부 버스 회사에서는 노약자라는 말 대신 교통약자,라는 어휘를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오늘 탑승한 271번에 그렇게 쓰여 있더군요. 저는 서사성과 압축미가 있는 조어 교통약자,라는 말을 두 어번 발음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