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기도에 새 작업실을 구했다. 올해 여름은 말벌, 쥐며느리, 공벌레 수천 마리와 함께 난다.
며칠간 장판을 걷고 벽지를 뜯어내고 금이 간 곳곳을 시멘트로 메꾸고 물청소를 했다.
앞으로는 중고매장을 돌며 책상과 의자와 소파를 구하고 페인트를 칠해야 한다.
집에 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아파트로 옮겨 산지 15년이 넘은 집주인은
세입자가 알아서 재량껏 지내길 바라고 있다. 개척정신 돋는다.
정을 들이기 시작하자 무섭도록 능숙하게 허들을 넘고 있다.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이러다 콜럼버스 되겠네.
2. 마라톤 참가 이후로 만화동호회와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알량하기 짝이 없는 단 하루의 개인 운동회였을 뿐인데
이 경험이 나의 의욕과잉분비선을 잘못 건드린 것 같다.
3. 모아둔 적금 안에서 대출을 받아 보증금을 마련했다.
든든한 민족은행, 농협에서 해지 대신 권유해 준 방법이다.
한도 내에서 빌려 쓰는 안전한 방식이지만 매달 이자가 나가니
가능한 한 빨리 금액을 갚아둬야 한다. 때맞춰 알바를 시작하는데
동물탈을 쓰고 8시간 동안 길에 있는 일이다. 흥미가 진진하다.
4. 막내 동생의 얼굴을 못 본 지 4개월이 되어간다.
한겨울에 공항에서 배웅을 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5. 저녁에 파스타집에서 치즈샐러드를 서비스로 내주었다.
오랜만에 온 단골이라는 게 이유인데 전혀 타당하지가 않았다.
하루에 수백 명이 오가는 유명한 프랜차이즈점이고 일 년에 고작 두세 번 정도 들렀을 뿐이다.
매번 후드티에 슬리퍼를 끌고 가서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면을 주문하고 조용히 식사했다.
인파 속에서 기를 뺏기기 일쑤인 나는 어느 식당에서든 희미한 얼굴로 앉아있었을 것이다.
그 몰골의 나를 기억한다는 것과 호의를 베푼다는 일, 두 가지 각각이 놀라운 충격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풀더미는 맛이며 모양이며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애피타이저라는 문화가
인류에게 왜 존재하는지 알 것 같았다. 향신료와 어우러진 채소에서는 거의 햄맛이 났다.
와인을 시켰다간 자칫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분위기가 될 것 같아서
다음에 작은 선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6.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발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