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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Les non dupes errent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_라캉 근대여, 안녕 _모던타임스의 마지막 장면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그들은 어디로 걸어갔을까. 그리고 무엇을 보았을까. 그림자를 끌고 가는 뒷모습에서는 조금쯤 가난하고 따뜻한 냄새가 난다. 막막하고 아득해 보이는 길은 금세 어둠과 피로를 불러들이고 이들은 곧 모랫길에 주저앉아 다 부서져버린 크로와상과 설탕맛 포도주를 맛보고 있을 것만 같다. 그저 아무 일 없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근대 역시 다른 방식으로 무참히 괴로웠지만, 아무리 관대하게 봐주어도 오늘날의 피로는 완전한 포화상태이다. 그것은 도저히 정답게 녹슨 형상으로 보이질 않는다. 지금의 피로는 틈과 무용성이 없는, 다만 무심으로 이뤄진 주사위 모양과 가깝다. 저자는 지금의 개개..

치료실 2023.09.10

달력 그림

어머니가 재택근무로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했던 20여 년 전, 나는 어린 엄마가 잠시 한 눈을 팔면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뜨거운 수제비통에 발을 담그는 등 식겁할 일을 만들어내는 유아였어.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달력을 주워왔고 나는 언젠가부터 달력 뒷면에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어렸을 때부터 예쁜 여자를 지치지도 않고 그렸어. 지금은 뒤틀리고 음습한 인물만을 그리고 있지만 오랜만에 멀쩡한 사람의 얼굴을 그리다 보니 아주 오래전,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마음을 다해 숨죽여 골똘하게 그려가던 시간이 생각난다. 추리소설 읽다가 그린 여자, 범인일 것 같았는데 범인이었던 여자. ps. http://musicovery.com/ Musicovery B2B on Strikingly ..

치료실 2023.09.10

유기농 관계

유기농 관계 26세까지 그는 기타 줄을 퉁겼다 매달의 임금은 76만 원 주말에는 짜장면에 탕수육 소(小) 자와 이과두주를 주문했다 일요일 아침 식은 탕수육을 같이 먹는 여자가 생겼다 그 여자는 고기와 담배를 좋아했다 등짝엔 검은 피지가 많았다 그는 여자가 길어오는 악몽에 매일 젖었다 삶은 밤가루 같은 귀지가 가득 찬 남자가 소리쳤다 젊은 놈은 더 먹고 늙은 놈은 덜 먹고 어떤 늙은 놈은 매우 잘 먹는다 꿈속에서 그 말은 잠언처럼 들렸다 그는 다음 악몽을 넘겼다 김 군이 이렇게 성공해 주었다니 이 노구는 대단히 고마울 뿐입니다 이즈음의 쇠고기는 비싸기 그지없는데 이런 요리를 사주시다니 그것 또한 고맙습니다 김 군에게 고맙습니다 그의 죽은 숙모가 복화술로 이야기했다 그는 어머니의 음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다고..

치료실 2023.09.10

88

아버지는 어머니가 할머니를 만나러 가고 없을 때면 돈까스를 사주곤 했다. 부드럽게 찢어지는 빵과 다디단 딸기잼이 나오는 경양식집이었다. 제대로 된 고깃덩어리를 삼키고 싶은 나는 정식이 부럽지만 언제나 돈까스를 골랐다. (정식에는 함박스테이크, 돈까스, 비후까스 세 덩어리가 작은 크기로 나왔다.) 그곳에서는 잘 먹지 않던 당근까지 남기지 않고 먹었다. 익힌 당근의 색은 곱고 예쁜 데다가 아주 작고 따뜻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까치단위로 파는 담배를 사서 하늘과 도로 사이의 어딘가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동네로 종종 관광 말이 들어왔다. 말이 한번 오줌을 싸면 골목길 전체가 젖었다. 누구도 말의 표정을 읽지 않고 말 등 위로 올라탔다. 말이 오랜 간 보이지 않은 후로 플라스틱 리어카 말이 들어왔다. ps..

치료실 2023.09.10

홀든 콜필드에게

새벽 3시쯤이었으면 해 약간 큰 소리였으면 좋겠어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 막 우는 거야 목소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괜찮아 상관없어 부르면 뛰어내릴게 너를 따라 우주선에 오를게 엔진 같은 건 필요 없지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만 부를 거야 네가 너라는 걸 내가 나라는 걸 서로 처음부터 알고 있어 말없이 웃자 목덜미의 새치를 안 아프게 뽑아줄게 천국에서 고양이 등까지 목성에서 천호대교까지 오른쪽 눈에서 왼쪽 눈까지 손을 잡고 횡단하자

치료실 202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