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45

88

아버지는 어머니가 할머니를 만나러 가고 없을 때면 돈까스를 사주곤 했다. 부드럽게 찢어지는 빵과 다디단 딸기잼이 나오는 경양식집이었다. 제대로 된 고깃덩어리를 삼키고 싶은 나는 정식이 부럽지만 언제나 돈까스를 골랐다. (정식에는 함박스테이크, 돈까스, 비후까스 세 덩어리가 작은 크기로 나왔다.) 그곳에서는 잘 먹지 않던 당근까지 남기지 않고 먹었다. 익힌 당근의 색은 곱고 예쁜 데다가 아주 작고 따뜻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까치단위로 파는 담배를 사서 하늘과 도로 사이의 어딘가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동네로 종종 관광 말이 들어왔다. 말이 한번 오줌을 싸면 골목길 전체가 젖었다. 누구도 말의 표정을 읽지 않고 말 등 위로 올라탔다. 말이 오랜 간 보이지 않은 후로 플라스틱 리어카 말이 들어왔다. ps..

치료실 2023.09.10

홀든 콜필드에게

새벽 3시쯤이었으면 해 약간 큰 소리였으면 좋겠어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 막 우는 거야 목소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괜찮아 상관없어 부르면 뛰어내릴게 너를 따라 우주선에 오를게 엔진 같은 건 필요 없지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만 부를 거야 네가 너라는 걸 내가 나라는 걸 서로 처음부터 알고 있어 말없이 웃자 목덜미의 새치를 안 아프게 뽑아줄게 천국에서 고양이 등까지 목성에서 천호대교까지 오른쪽 눈에서 왼쪽 눈까지 손을 잡고 횡단하자

치료실 2023.09.10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

내가 볼 때 오늘날 세계를 가르는 거대한 경계선은 보수와 진보, 부자와 가난한 자, 서로 다른 인종, 신념 들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들을 용기가 있는 사람과 이미 다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_매들린 올브라이트 이사를 하고 수술을 하고 간병을 하고 소설을 쓰고 새 일터에서 업무를 익히고 두 번째 고양이를 입양하는 동안 나는 조용한 시민 시늉을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세상사 통찰은 SNS 멋쟁이들이 대신해줬다. 일정이 없을 때면 일기에 조잡한 기분을 공들여 적고, 한 오백 년 된 지박령처럼 집에 머물렀다. 창밖에 별 일은 없었다. 매연 가득한 도심, 무심한 타인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아름다울 뿐인 한강의 야경이 가끔 그립기도 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의 삶은 의외로 ..

흡연실 2023.09.10

미안해, 얘들아

뭔가 애매하게 설명적이고, 희미하게 건전한 그림들이 학교 주변 통학로에 놓일 예정. 봄부터 경찰서에서 위기청소년들(위기는 내가 위기임)과 수상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진행하면서 몇 번이고 뼈저리게 느끼는 건 아이들이 아닌 어른이 문제라는 사실. 일의 과정이, 태도의 일관성이, 언행 하나의 진실성이 없는 우리들은 심지어 시끄럽기까지 하다. 아니 그래서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거겠지만. 이렇게 기만을 일삼으면 어른도 아이도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불쌍해지는데. 차츰 더 허약하고 불안해져서 쉬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데. 헬조선 같은 말로 문제를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싶지는 않고, 내내 고민 중.

흡연실 202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