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골원일지 21

2월 1일

1. 예술은 노동의 날들을 침해하지 않는 쓸모없는 단 하루의 창조로 남는 것이 아니라, 6일이자 7일이며 31일이고 365일인 모든 날들에 쓸모 있는 눈앞의 물건들을 지우며 그들이 부단히 다른 존재들로 바뀌는 사랑의 활동을 함께 살고 겪는 것이다. 그 활동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술의 적요한 고독이 아니라 추락하는 '너의 손바닥'들이다._진은영, 심보선 발문 중 2. 새벽 세 시 반에 깡깡 얼어붙은 작업실 변기를 깨며 생일을 맞았다. 3. 나는 아주 어릴 적에 내가 가졌던 공포와 낯섦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내가 박약아가 되는 데에 서른 해가 걸렸구나. 자신을 충분히 입증하는 데에. _이수명, , 서른 중 ps. http://vimeo.com/17971843

접골원일지 2023.09.10

늦가을 여기

쪽문으로 놀러 오는 동네 고양이 중 제일 시니컬하고 조숙한 변발이. 요새 사춘기인지 형제들이 나뒹굴고 놀 때 무시하고 주위를 빙 돌아 혼자 걸어간다. 어미 장고.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밀조밀. 있을 건 다 있다는 화개장터 작업장. 두 시간 걸린 손글씨. 조심조심 쓰다 보니 막상 표어가 무색. 어여쁜 우리 동네. 이날 다른 곳 벼룩시장에서 배추전을 파느라(한 장에 천 원, 백장 부치고 3일 기절) 참석하지 못했다. 아. 여기서 꼭 '떡뽑기'를 뽑고 싶었는데. 다음엔 가야지. 싸고 좋은 알짜배기 시장. 추워지기 전에 놀러 와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미 추워졌으니 아무 때나 와요. 커피 내려줄게. 파스타 해줄게.

접골원일지 2023.09.10

알 수 없는 일들

1. 경기도에 새 작업실을 구했다. 올해 여름은 말벌, 쥐며느리, 공벌레 수천 마리와 함께 난다. 며칠간 장판을 걷고 벽지를 뜯어내고 금이 간 곳곳을 시멘트로 메꾸고 물청소를 했다. 앞으로는 중고매장을 돌며 책상과 의자와 소파를 구하고 페인트를 칠해야 한다. 집에 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아파트로 옮겨 산지 15년이 넘은 집주인은 세입자가 알아서 재량껏 지내길 바라고 있다. 개척정신 돋는다. 정을 들이기 시작하자 무섭도록 능숙하게 허들을 넘고 있다.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이러다 콜럼버스 되겠네. 2. 마라톤 참가 이후로 만화동호회와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알량하기 짝이 없는 단 하루의 개인 운동회였을 뿐인데 이 경험이 나의 의욕과잉분비선을 잘못 건드린 것 같다. 3. 모아둔 적금 안에서 대출을 받..

접골원일지 2023.09.09

5월의 개

오늘 낮에는 광화문에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유학을 가 있는 어린 동생을 위해 이런저런 도서를 구해야 했거든요. 해가 내리쬐는 한낮에 잿빛 스웨터를 걸친 저를 보고 어머니께선 너는 예의가 없으며 세상을 잘못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철야예배라도 나가 전심전력 기도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경기로 이사를 간 뒤부터 날씨를 체득하는 일이 몹시 어려워졌습니다. 오전만 해도 옥상에 서서 강풍에 시달렸습니다. 바깥이 여전히 추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대로 한복판에 있는 분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검은 콩국수와 비빔냉면엔 누군가 사카린을 들이부은 것 같았습니다. 우울함을 유발하는 단맛을 없애기 위해 냉면에 식초를 쏟아봤지만 미지근한 면발 사이로 날치알 같은 기포가 조금 차올랐을 뿐 맛은 ..

접골원일지 2023.09.09

조잡한 유기체

1. 몇 번의 이사를 통해 내가 얼마나 무서운 집적형 인간인지를 깨닫고 있다. 대학시절의 서류들만 몇 박스인지 모르겠다. 다시 안 볼 책들도 참 많이 샀다. 목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쓰고 견고한 짐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생각난 듯 당근주스를 한 잔 마시고 연속극을 보면서 방의 짐이 증발되어 있길 빌었지만 -_- 문을 열면 각종 파일과 비닐과 박스가 계속해서 객관적으로 쌓여있다. 라디오를 켜 놓고 몇 명의 디제이들을 만나면서 '우선 눈에 안 보이게 하는 데'에 반나절을 소비했다. 아버지의 일기장 몇 권을 찾은 것이 짐정리의 주요 수확. 2. 이사 전에 마라톤 신청을 해둔 게 화근이 되어 짐을 방치해 둔 채 뛰러 나갔다. 두 시간 정도만 달리는 거야. 껌이지. 씁씁 후후!! 하지만 실제체력은 시궁창. 걷고..

접골원일지 2023.09.09

3월의 2일

1. 막내 동생이 도미한 지 꼭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주 화요일 인천공항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음울하게 울고 있던 파란색 야상을 봤다면 그게 나일 것이다. 정작 그 애는 침착했는데 나는 코에 자꾸 와사비가 들이차서 의연할 수 없었다. 자그마치 4년을 못 본다. 동생은 수능을 발로 봤는지 국내대학에 모두 낙방하고 급히 쓴 자기소개서와 고교시절 내신기록을 통해 너무도 황급히 이곳을 떠나버렸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지는 몰랐다. 과정과 절차가 4대강 사업과 진배없었다. 심지어는 수속도 빨랐다. 몇 마디 나눌 기회도 없이 우리는 간단히 분리되었다. 동생은 어정쩡하게 등이 굽은 자세 그대로 문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마침 그날 내 가방 속에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집이 들어있었는데 유난히 미국병에 대한 소회가 많았다..

접골원일지 2023.09.09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

I was happy in the haze of a drunken hour 술에 취해 비틀거릴 땐 참 행복했는데 But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 지금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는 하늘만 알아 I was looking for a job, and then I found a job 일자리를 찾아다니다, 결국 찾았지 And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 그리고 지금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하늘만이 알고 있지 In my life Why do I give valuable time 왜 내가 인생의 이 귀중한 시간을 To people who don't care if I live or die? 내가 죽건 말건 상관도 안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는데? Two lovers en..

접골원일지 2023.09.09

충무로에서 만난 진호어머님께 참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네요

출력물을 찾고 명보극장 앞 흡연구역에서 쉬고 있는데 뛰놀던 초딩 남자애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작게 묻는다. ...엄마, 여자가 담배 피워도 돼요? 그러자 어머님께서 지체 없이 그-럼!!! 이라고 외쳐주셨다. 지난번엔 자식의 눈을 가리시는 어머님도 있었는데. 전방 100미터나 떨어져 있어도 그땐 참 무안했는데. 어머니의 똘레랑스적 발언에 놀란 아이들. 좋은 일로 자주 놀라고 깨어나면서 쑥쑥 자라렴.

접골원일지 2023.09.09

첫 KO승

-_-;; 닌텐도 위 게임으로. 복싱 수련생으로서 겸허한 자세로 여유 있게 임해야 했는데 자중하지 못하고 분기탱천하여 열심으로 추하게 이겼다. 다시 보기로 경기 화면을 지켜보니 자비라곤 없는 공격. 밑도 끝도 없는 안면강타의 연속. 맞으면 아픈 리얼한 링에서나 그렇게 해보자. ps. 포기시인은 이런 말을 남길 듯. 현대의 시뮬라르크는 더욱 거대해진 솜사탕. 가상실재에 휘둘리는 너는야 바보. 지식인의 비굴함과 나태는 우리 시대의 올림픽 종목이 돼버렸다. 장 보들보들 보드리야르. 그렇다면 유물론적 변증법과 데페이즈망의 방식으로 밴디지를 왼손 오른속 5번씩 곱게 감아보는 거야. 그래. 그렇게. 이제는 웃는 거야. 스마일 어게인. 스마일 어게인........................................

접골원일지 2023.09.09

아빠, 미안

가벼운 마음으로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려놓고 나서는 차마 보여 드리지 못했다. 이제는 산소통도 링거도 사라지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실 정도로 호전.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면 육회(최고급 한우로), 육포(씹는 맛 두툼한) 추어탕(약도를 친히 그려 주시며), 딸기(나 배), 등등을 꼽으시니(대체로 선도 높고 비싼) 그게 다행. 아버지가 없는 집이 이제 익숙해진다. 겨우내 고장 나 있는 보일러도 이제 견딜만하다. 어떤 자극이든 적당량의 시간만 지나면 괜찮아.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무뎌져 가는 건가. 나이를 먹는 일은.

접골원일지 2023.09.09